소노라 송신소

러일전쟁과 히비야 폭동

일본 2017.11.04 10:31 by 소노라

러일전쟁(1904~1905) 당시 일본의 전비는 17억 2121만엔이었다. 이는 1904년 일본 정부 세입 총액 3억 3천만 엔의 5배, 1903년 일본 정부 일반회계 약 2억 5천만엔의 7배를 웃도는 액수였다. 러일전쟁 10년전에 있었던 청일전쟁(1894~1895)에서 일본의 전비는 2억 3천만 엔이었는데, 청나라로부터 전쟁 배상금으로 3억 6천만 엔을 얻어낼 수 있었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 정부는 전비의 82.4%에 달하는 14억 7300만 엔을 공채를 통해 모집했는데, 그 가운데 8억 56만 엔이 외채였다. 또, 전시에 동원된 병사 109만 명의 과반인 55만 명이 농촌 출신이었다. 당시 농촌은 사람뿐만 아니라 소와 말도 징발되었기 때문에 노동력 부족이 심각한 상태였다. 또, 러일전쟁 당시 전시세 명목으로 추가된 비상특별세(非常特別税)도 폐지되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 국내에서는 러시아로부터 막대한 배상금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실제로 1905년 6월 30일, 일본 정부가 결정한 강화 조건 10개 항에서는 군비 배상 문제를 가능한 관철시켜야 할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었다. 이 조건에 따르면, 배상금은 최고 15억 엔에서 구체적 액수는 상황에 따라 결정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한 치의 땅도, 한 푼의 돈도 줄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일본은 승리하기는 했지만 전쟁을 지속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일본에 우호적이던 제3국들의 여론도 시간이 지나면서 러시아에 유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결국, 일본 정부는 배상금과 영토(사할린) 문제로 강화가 결렬된 위기에 처한 8월 28일, 배상금과 사할린 할양 문제를 모두 포기하더라도 강화를 성립시켜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다. 이 훈령을 받은 일본측 전권대사 코무라 주타로우(고무라 주타로)는 배상금을 완전히 포기하고 사할린을 양분하는 선에서 강화 회담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기대했던 배상금도 받지 못했고, 전비를 위해 모집한 채권은 모두 국민신민의 세금으로 상환해야 했으며, 전시 특별세도 폐지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의 국내 여론은 격앙되어 갔다. 신문들은 배상금을 받아내지 못한 정부를 비판했고, 강화 조약에 반대하는 히비야 폭동이 발생했다. 정부 고위 관료들의 저택과 파출소, 강화를 지지한 신문사 등이 습격을 받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계엄령이 선포됐다.


[참고 자료]

1. 구태훈, 『일본근세·근현대사』, 수원: 재팬리서치21, 2008.

2. 김후련, 『일본 신화와 천황제 이데올로기』, 서울: 책세상, 2012.

3. 스즈키 마사유키, 류교열 역, 『근대 일본의 천황제』. 서울: 이산, 1998.

4. 일본역사교육자협의회 엮음, 김현숙 역, 『천황제 50문 50답』, 서울: 혜안, 2001.

5. 정창석, 『만들어진 신의 나라』, 서울: 이학사, 2014.

6. 윤현명, "근대일본의 임시군사비에 대한 일고찰," 『한국학연구』28, 2012, pp.1-39.

7. 조명철, "포츠머스조약과 배상금 문제," 『일본역사연구』32, 2010, pp.157-186.


작성일: 2016년 9월 9일 13시 44분




신고

'일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러일전쟁과 히비야 폭동  (0) 2017.11.04
전진훈의 역설  (0) 2017.01.02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2) 2016.08.18
전범은 우리가 직접 처벌한다  (0) 2016.08.14
대명강하  (0) 2016.08.13
군부대신 현역무관제  (0) 2016.08.12

북한의 채무

국제정치 2017.11.03 11:43 by 소노라

북한은 많은 나라들에 빚 즉, 채무를 지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북한 채권은 나름대로 거래가 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휴지 조각 취급을 받는다. 그 이유는 간단한데 바로 북한에게는 돈을 갚을 생각도, 그럴 의지도 없기 때문이다. 북한이 악성 채무불이행을 한 역사는 꽤 오래되었다. 또, 자본주의 국가들만 북한에게 돈을 떼인것은 아니다. 사회주의 국가들 사이에서도 북한 채권은 악명이 높았다. 1980년 1월, 황화 당시 중국 외교부장은 외교부 간부들을 대상으로 내부 연설을 한 바 있는데 여기서 황화는 북한이 돈을 갚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표시한 적이 있었다.


조선[북한]은 우리에게 몇십억의 빚을 지고 있는데 이를 서서히 갚을 수는 있어도, 갚기를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공짜로 주는 것은 주는 것이고 빌리는 것은 빌리는 것입니다. [……] 우선 기한이 다되어 마땅히 갚아야 할 빚은 시기를 쪼개서 분할상환할 수 있으며 경제적으로 곤란하다면 연기시킬 수도 있으나, 기한이 되었으면 이지를 갚아야 함과 동시에 상환을 연기하는 빚의 이자도 계산해야 합니다.[각주:1]



어떤 나라들은 북한의 전략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대표적인 나라가 러시아다. 2007년에 북한은 러시아에게 자신이 러시아에게 지고 있는 채무 88억 달러를 '정치적 결단'을 내려 탕감해 달라고 요청한 바 있었다. 결국 2014년 러시아는 북한의 채무 110억 달러중 100억 달러를 면제해줬다.[각주:2] 여기에는 당연히 푸틴의 '정치적 결단'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러시아가 처음부터 돈 갚기를 포기했던 것은 아니다. 때인 돈은 받고 싶어하는 것이 인지상정, 그러나 채무자인 북한은 돈을 갚을 생각이 없다. 이때 러시아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한국(남한)이 대신 갚으라는 것이었다.


마트비옌코 [러시아 사회담당] 부총리는 러시아 측이 북한의 화력발전소 현대화를 위해 투자한 돈을 한국이 북한 대신 갚아달라는 것이다. 즉, 북한에 투자한 러시아 돈은 한국에 지고 있는 러시아 채무의 일부에서 변제하는 게 바람직할 것 같다는 해법을 제시해왔다.[각주:3]


물론, 남한보고 북한의 돈을 대신 결제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남한의 대러시아 채권액 중 북한의 대러 채무액만큼 탕감해달라는 주장이기 때문에, 사실상 남한이 북한 대신 돈을 갚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진다.


한편, 체코의 사례도 흥미롭다. 2010년 8월, 체코 정부는 북한 측에 1000만 달러[각주:4]를 갚으라고 요구했다. 물론 북한에 그럴만한 현금이 없을 것이니 아연광으로 갚으라는 조건이었다. 이에 대해, 북한은 채무의 일부를 아연광 대신 인삼으로 갚겠다고 말해왔다.


북한은 50만 달러 가치의 '천혜의 인삼뿌리' 400톤으로 대신하겠다고 답했다. 체코의 연간 인삼 소비량은 고작 2톤이다. 북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체코는 200년 어치의 인삼(성기능 향상 외에 많은 효능이 있다고 한다)을 축적할 수 있었을 것이다.[각주:5]


  1. 오진용, 『김일성시대의 중소와 남북한』, 파주: 나남, 2004, p.77. [본문으로]
  2. http://www.rfa.org/korean/in_focus/food_international_org/debt-05062014151947.html [본문으로]
  3. 정재문, 『소련은 그리 먼곳이 아니었다―나의 모스크바 담판』, 서울: 오름, 2003, p.178. [본문으로]
  4. 2010년 당시 체코와 북한이 채무액수를 300만 달러 수준으로 조정하는 데 합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https://www.voakorea.com/a/4088420.html [본문으로]
  5. (Victor Cha, The Impossible State: North Korea, Past and Future, New York: HarperCollins, 2012..) 김용순 역, 『불가사의한 국가: 북한의 과거와 미래』, 서울: 아산정책연구원, 2016, pp.177-178. [본문으로]
신고

'국제정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한의 채무  (0) 2017.11.03
이스라엘의 헌법  (0) 2016.12.21
제1타격력과 제2타격력  (0) 2016.08.15

정통 중국현대사

서평 2017.06.30 19:12 by 소노라

(中国共产党中央委员会文獻研究室, 『關于建國以來黨的若干歷史問題的決議』, 北京: 人民出版社, 1985.) 허원 역, 『정통 중국 현대사: 중국공산당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 서울: 사계절, 1990.


평점: 양호(8.5/10)


왕조 시대때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새 왕조가 직전 왕조의 정사를 편찬하는 관례가 있었다. 명나라가 망하자 청나라가 명사를 편찬하고, 고려가 망하자 조선이 고려사를 편찬하는 식이었다. 역사를 해석할 때에는 정사에 따라야 했다. 오늘날 중국에도 정사에 비견될 만한 것이 있다. 바로 '건국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다.


1981년 6월 열린 중국공산당 제11기 제6차 전체회의(11기 6중전회)는 '건국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지금까지 중국공산당 역사에서 역사결의는 두 번 있었다. 1945년 6기 7중전회(중국공산당 제6기 중앙위원회 제7차 전체회의)에서 채택된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가 첫째고, '건국이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가 둘째다. 첫번째 역사결의를 통해 "마오쩌둥 사상이 중국공산당의 지도 이념으로 확립"[각주:1]되었다면, 두 번째 역사결의를 통해 덩샤오핑과 실천파들은 자신들이 몇 년전 거둔 정치적 승리를 재확인하고, 마오쩌둥을 신에서 인간의 위치로 되돌림으로써, 필요한 경우 마오의 사상에 반대할 수 있는 기틀을 닦아놓았다. 이것은 역사, 특히 당대사는 단지 학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임을 잘 드러내는 일화다.


흐루쇼프는 소련 공산당 20차 전당대회를 통해 전임자 스탈린을 격하했다. 그 유명한 '비밀 연설'을 통해서다. 흐루쇼프와 소련에게는 레닌이 있었다. 스탈린을 신랄히 비판하더라도(그리고 사실 이것은 스탈린이 온당히 받았어야 하는 비판이었다) 마지막에는 레닌에게 기댈 수 있었다. 한편, 마오쩌둥의 마지막 10년을 장식한 문화대혁명은 처참한 재앙이었다. 마오쩌둥은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또, 덩샤오핑, 천윈 등은 바로 그 문화대혁명으로 시련을 받은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덩샤오핑은 '흐루쇼프가 스탈린 비판하듯' 마오쩌둥을 비판할 수는 없었다. 마오쩌둥은 중국의 레닌이자 스탈린이었기 때문이다. '건국이래 역사결의'는 몇 번의 수정을 거쳐 완성됐다. 그 과정에서 덩샤오핑은 자신의 의견을 몇 차례 밝혀가며, 자신의 의도대로 결의를 이끌어갔다. 덩샤오핑은 마오를 비판하는 것이 얼마나 민감한 문제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모택동동지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서거할 때까지 줄곧 우리 당의 영수였습니다. 모택동동지의 오류에 대하여 도가 지나치게 써서는 안됩니다. 도를 넘게 되면 모택동동지의 얼굴에 먹칠을 하게 될 뿐 아니라 우리 당과 우리나라의 체면에도 먹칠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에 어긋납니다.[각주:2]


결국 '건국이래 역사결의'는 마오쩌둥에게도 잘못이 있었지만 그는 위대한 무산계급혁명가였노라고 공칠과삼식의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공적이 과오를 압도하고, 공적이 1차적이라면 과오는 2차적이라는 식이다. 덩샤오핑이 가장 중점을 두었던 것도 이 부분이었다.


결의원고를 한번 보았습니다. 안되겠습니다. 다시 써야 하겠습니다.

……문건 전체가 너무 침울하여 결의같지 않습니다. 수정하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잘못된 것은 비판하되 적절하게 해야 합니다.[각주:3]


'건국이래 역사결의'이기는 하지만, 결의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의 역사만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1949년 이전의 중국공산당 역사도 다루어지고 있다.


한편, 1983년에는 '건국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 주석본 초본이 발행되었고, 1985년에는 수정본이 발행되었다. 이 책은 1985년 수정본을 번역한 것이다. 중국어 인명은 모두 한국식 독음으로 번역됐지만,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좋은 책이지만, 나온지 오래되어 구하기 어렵다는 점은 흠이다.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역사결의가 중국공산당이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당대사를 해석한 것인만큼, 학술적으로 볼 때 중립적이거나, 왜곡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 현대사를 이 역사결의만을 가지고 공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이 책은 좋은 책이다.


  1. 조영남, 『개혁과 개방: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1, 1976~1982년』, 서울: 민음사, 2016, p.392. [본문으로]
  2. (中国共产党中央委员会文獻研究室, 『關于建國以來黨的若干歷史問題的決議』, 北京: 人民出版社, 1985.) 허원 역, 『정통 중국 현대사: 중국공산당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 서울: 사계절, 1990, p.75. [본문으로]
  3. (中国共产党中央委员会文獻研究室, 『關于建國以來黨的若干歷史問題的決議』, 北京: 人民出版社, 1985.) 허원 역, 『정통 중국 현대사: 중국공산당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 서울: 사계절, 1990, pp.70-71. [본문으로]
신고

'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통 중국현대사  (4) 2017.06.30
덩샤오핑 평전  (0) 2017.06.23
"강대국 국제정치의 비극"을 읽고  (0) 2016.05.25
유엔과 일본외교를 읽다  (0) 2015.10.24
TAG 사평

덩샤오핑 평전

서평 2017.06.23 20:45 by 소노라

(Benjamin Yang, DENG: A Political Biography, M.E. Sharpe, 1997.) 권기대 역, 『덩샤오핑 평전』, 서울: 황금가지, 2004.


평점: 보통(7.0/10)


이미 제목 자체가 책의 내용을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굳이 어떤 책인지 더 쓸 필요도 없다. 이 책은 덩의 유년 시절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그의 전 생애를 다룬 책이다. 저자는 마지막 결론에서 덩샤오핑이 위대한 정치가이자 경세가였노라고 평가한다.


필자는 모든 역사적 실책과 정치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덩이 위대한 정치가로 기억될 것이며, 순전히 역사적 의미에서 20세기 마지막 25년간 중국을 지배한 통치자로 기억되리라고 믿는다.[각주:1]


그렇지만 이 책이 덩샤오핑을 일방적으로 추앙하는 책은 결코 아니다. 예를 들어, 저자는 반우파 투쟁과 관련해서는 덩샤오핑에게도 적지 않은 책임이 있다고 언급한다.


공식적인 덩의 전기 작가들은 이 주제를 짜장 회피해 왔다. 아직 우리가 모르고 있으며 찾을 수도 없는 세세한 부분이 너무나 많기는 하지만 반우익 운동에서 덩이 결정적 역할, 어쩌면 마오까지 포함하여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더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다.[각주:2]


실제로 반우파 투쟁 당시 덩샤오핑은 중공중앙서기처 총서기(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처 총서기)로, 반우파 투쟁에 적지 않은 책임을 지고 있다. 이 점이 덩샤오핑의 정치적 약점중 하나였음은 분명한데, 실제로 덩샤오핑은 최고 실권자로 등극한 이후에도 "반우파 투쟁은 필요했고, 잘못은 확대에 있다."[각주:3]고 주장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적당한 균형 감각을 맞추었다고 보여진다. 책은 411쪽으로 결코 짧은 분량은 아니지만, 독자를 지겹게 한다거나 어렵게 만드는 문체는 아니다. 원서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번역판은 그렇다.

이렇듯 번역도 만족스럽다. 다만, 종종 등장하는 오역이 몰입도를 다소 떨어뜨린다.  이 '오역' 문제는 직책 문제에 한정된다. 예를 들어,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의 오역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중앙위원회 부주석의 오역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오역
"인민회의 의장":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의 오역
"전국인민대표대회 주석":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의 오역
"중앙군사위원회 총서기":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의 오역
"중앙고문위원회 주석": 중앙고문위원회 주임의 오역
"국방장관": 국방부 부장의 오역

등이 그것이다. 중국의 직책을 영어로 표기하고, 그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는 중역 과정에서 오역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중앙고문위원회의 수장(中国共产党中央顾问委员会主任) 은 '주임'이지만 이것이 영어로는 "Chairman of Central Advisory Commission"로 번역됐고, 다시 한국어로 중역하면서 'chairman'을 '주석'으로 번역한 것이 아닌가 싶다.



  1. (Benjamin Yang, DENG: A Political Biography, M.E. Sharpe, 1997.) 권기대 역, 『덩샤오핑 평전』, 서울: 황금가지, 2004, p.399. [본문으로]
  2. (Benjamin Yang, DENG: A Political Biography, M.E. Sharpe, 1997.) 권기대 역, 『덩샤오핑 평전』, 서울: 황금가지, 2004., p.205. [본문으로]
  3. 조영남, 『개혁과 개방: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1, 1976~1982년』, 서울: 민음사, 2016, p.380. [본문으로]
신고

'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통 중국현대사  (4) 2017.06.30
덩샤오핑 평전  (0) 2017.06.23
"강대국 국제정치의 비극"을 읽고  (0) 2016.05.25
유엔과 일본외교를 읽다  (0) 2015.10.24
TAG 서평

전진훈의 역설

일본 2017.01.02 21:18 by 소노라

1941년 1월 8일 당시 육군 대신이던 도조 히데키는 전진훈을 공포한다. 특히, 전진훈 2장 8조에는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고 되어 있다.


1945년 9월, 도조는 자신에 대한 체포 명령이 내려지자 권총 자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당시에도 이와 관련해 논란이 많았다. 첫째는 그 시기가 너무 늦었다는 점이다. 패전 각의에 서명한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대신이 8월 15일 새벽에 할복 자살한 점을 고려할 때, 도조의 자살 시도는 뒤늦은 감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것이 지탄받았던 큰 이유는 도조가 칼로 할복 자살한 것이 아니라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가슴을 권총으로 쏘았다는 점이 큰 지탄의 이유가 되었다. 일각에서는 도조가 진심으로 자살할 마음은 없고, 그저 보여 주기 위해 총을 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다.


이후, 도조 히데키는 병원에서 (미군 병사의)수혈과 치료를 받았다. 여기서 그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신고

'일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러일전쟁과 히비야 폭동  (0) 2017.11.04
전진훈의 역설  (0) 2017.01.02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2) 2016.08.18
전범은 우리가 직접 처벌한다  (0) 2016.08.14
대명강하  (0) 2016.08.13
군부대신 현역무관제  (0) 2016.08.12
1 2 3 4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22)
항공송신소 (1)
비공개 (0)
일반 (0)
서평 (4)
일본 (11)
중국 (3)
국제정치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