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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7월 26일, 주요 3대 연합국(미국·영국·중국)의 명의로 포츠담 선언이 발표된다.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과 소련간의 중립조약이 유효했기 때문에, 소련을 통한 강화 협상(조건부 항복) 공작이 진행되고 있었다. 따라서 29일 오후 4시, 스즈키 간타로 수상은 이를 묵살한다는 '문제 발언'을 하게 된다. 일부에서는 이것이 번역의 문제였다고 이야기하고는 한다. 그러나 "포츠담 선언에는 별 가치가 없다, 전쟁 완수에 매진하겠다"는 문맥을 볼때 이것이 오역 문제가 아님은 분명해진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다. 이것이 원폭이라는 미국 측 발표에 의심을 갖던 일본 정부가 원폭임을 확인한 것은 8일이었다. 9일 오전 6시, 사코미즈 히사츠네 내각 서기관장에게 소련의 중립조약 파기 다시 말해, 소련의 대일전 참전 소식이 전달된다. 오전 10시 30분에 열린 최고전쟁지도회의가 30분 가량 진행됐을 무렵인 11시 2분에는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투하된다.

 

최고전쟁지도회의는 1944년 8월 4일 기존의 대본영정부연락회의를 대체해 새롭게 설치된 회의체였지만 연락회의와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대본영정부연락회의는 1937년 11월 처음 열렸는데 출석자는 정부에서는 내각총리대신(수상), 육군대신(육상), 해군대신(해상), 외무대신(외상)이, 대본영 측에서는 (육군)참모총장, (해군)군령부총장 등으로 내각과 통수부간의 의견을 조정하기 위해 개최된 것이다.

 

그러나 이 최고전쟁지도회의에서도 결론이 나지 않게 되자, 오후 11시 50분 히로히토가 참석한 가운데 어전 회의가 열리게 된다. 어전회의에는 추밀원 의장인 히라누마 기이치로, 내각 서기관장 사코미즈 히사츠네, 해군 군무국장 호시나 젠시로 등이 배석했다.

 

어전회의에서도 포츠담 선언의 수락을 둘러싸고 3대3의 팽팽한 대립 구도를 보이게 된다. 결국 10일 오전 2시, 스즈키 수상은 히로히토에게 성단을 요청하는데, 여기서 히로히토는 자신이 도고 외상과 생각이 같다고 말함으로써 포츠담 선언의 수락이라는 대방향이 정해지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히로히토의 1차 성단이다. 그렇다고 히로히토는 평화주의자였으며 군부에 끌려갔을 뿐이라는 식의 인식은 곤란하다.

 

정권 핵심에서 결단을 내려 달라는 요구가 나온 것은 이미 지난 2월이었다. 3차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으며 훗날 GHQ에 의해 전범 혐의자로 지목되자 자살하게 되는 고노에 후미마로가 패전은 이미 필지라는 상주문을 올린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히로히토는 더 큰 전과를 올린 후가 아니면 어렵다며 거절의 뜻을 밝혔고 그 결과로 수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아무런 의미 없이 스러져갔던 것이다.

 

10일 오전 7시, 중립국인 스위스와 스웨덴을 통해 포츠담 선언의 4대 연합국(미국·영국·중국·소련)에게 통보된다. 그 조건은 천황의 통치 대권에 수정을 가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였다.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번스 국무장관, 스팀슨 육군장관, 포레스탈 해군장관 등과 함께 회의를 열었고 일본에 대한 회신안 초안이 완성됐다. 이 초안은 다시 포츠담 선언의 다른 세 연합국 즉, 영국·중국·소련에게 전달된다. 소련은 전후 일본 점령에 대해 미국과 소련이 각각 최고사령관을 파견한다는 조건을 들었지만 이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렇게 전달된 연합국측의 회신은 다시 일본 정부에 분열을 가져오게 된다. subject to라는 부분이 문제가 된 것인데, 외무성은 군부를 의식해 이를 '(천황과 일본 정부의 통치권은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제한하에 둔다'로 번역했지만, 군부 측은 이를 '예속된다'로 번역하고 국체 유지가 불가능해지므로 1억 총옥쇄를 주장한 것이다. 이 13일의 회의에서도 다시 3대3으로 의견이 분열될 조짐을 보이자 14일 오전 11시, 다시 어전회의가 열린다. 여기서 히로히토는 최후의 선언을 내리게 된다. 바로 두 번째 성단이다.

 

2차 성단이 내려지자 종전 조서의 작성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몇 가지 수정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은 전세는 날로 불리해졌다는 부분이 전국은 호전되지 않았다로 수정된 것이다. 이 부분은 아나미 육군대신의 강력한 반발로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의 발표는 모두 거짓말이 되는 것이니, 우리는 전쟁에 패한 것이 아니라 전국이 호전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주장한 것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14일 오후 9시에는 라디오를 통해 내일 오전 중대 방송이 있을 것임이 알려진다. 그리고 밤 11시 20분부터 황궁에서 히로히토가 직접 녹음을 마쳤다. 두 장의 음반에는 5분 분량의 히로히토의 목소리가 담겨졌다. 이 음반들은 다음날 방송때까지 도쿠가와 의전비서가 보관했는데 일부 군부 인사가 이 음반을 탈취하려는 궁성 사건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15일 오전 7시 21분에는 전날 밤의 중대 방송이 히로히토의 직접 방송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정오에 히로히토의 목소리가 전파를 타게 된다. 사실 천황의 목소리가 전파를 타게 된 것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첫번째는 '사고에 의한 것'이었던만큼, 사실상 첫번째가 되는 셈이다. 당시 일반인들이 사용하지 않는 용어와 히로히토의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바로 이것을 알아들은 사람은 드물었고 이후 아나운서의 설명을 통해 일본의 패전 소식을 알게 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재밌는 점은 메이지 헌법 체제의 붕괴가 이 때를 포함해 2차 대전 시기에 매우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원래 포츠담 선언의 수락에 대한 결정은 추밀원의 자순사항에 상당하지만,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저 추밀원 의장이 어전회의에 참석하는 것으로 갈음했을 뿐이다. 진주만 공습 당시에도, 선전 포고에 대한 자순권을 갖고 있던 추밀원은 사후 추인 기관에 지나지 않았다. 내각 역시 최고전쟁지도회의에서 이루어진 결정을 형식적으로 추인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참고문헌]

小森陽一, 송태욱 역, 『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서울: 뿌리와이파리, 2004.
Stephen Walker, 권기대 역, 『카운트다운 히로시마』, 서울: 황금가지, 2005.
吉田 裕, 최혜주 역, 『아시아태평양전쟁』, 서울: 어문학사, 2012.
石川 眞澄, 박정진 역, 『일본 전후정치사』, 서울: 후마니타스, 2006.
半藤 一利, 이정현 역, 『일본의 가장 긴 하루』, 서울: 가람기획,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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