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노라 송신소

일본 최후의 전시내각인 스즈키 간타로 내각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던 8월 14일,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는 내각을 맡으라는 소식을 전해 받는다.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는 황족 출신으로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의 아들이며 히로히토에게는 고모부가 된다.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는 육군대장으로 1941년부터 방위총사령관과 군사참의관을 지냈다. 이처럼 일제의 남자 '황족'은 군인 출신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는 1910년 황족신위령(皇族身位令)에 따라 육해군의 무관(장교)로 임관해야 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히가시쿠니는 전시에도 내각총리대신 하마평에 오른 적이 있었다. 1941년 10월, 제3차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이 사퇴하자 후임 총리 하마평에 오르기도 했지만 히로히토의 의지에 따라 도조 히데키 내각이 출범하게 된다. 어쨌든 8월 14일의 이 요청에 대해 히가시쿠니는 거부감을 보였지만 결국 받아들인다.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는 1947년 신적강하를 통해 황적에서 이탈하면서 히가시쿠니라는 성을 창설[각주:1]하게 된다. 즉, 1945년 8월 당시까지는 아직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가 왕(王)으로서 황족 신분에 있었으므로, 이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은 '황족 내각'이 되는 셈이다. 이 내각은 일본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황족 내각이었으며 또 최단명 내각(53일)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히가시쿠니 내각이 공식 출범한 건 8월 17일이었다. 우선 과제중 하나는 항복이 확정된 이상 항복문서에 누가 서명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당초 일부 연합국에서는 히로히토가 직접 서명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시게미츠 마모루 외무대신과 우메즈 요시지로 참모총장이 각각 일본 덴노/정부와 대본영을 대표해 "일본 개벽 이래 불명예인 문서에 이름을 써넣"[각주:2]게 되었다.


히가시쿠니 내각의 외상이었던 시게미츠가 전범 혐의자들을 일본 정부가 직접 재판하겠다는 뜻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에 전달했다가 거절 당한 후인 9월 18일, 히가시쿠니는 외국인 기자들에게 일본이 직접 전범을 처벌하겠다고 밝혔다. 9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일본은 실제로 전범혐의자 8명에 대한 재판을 진행했는데 이 재판은 GHQ에 의해 무효로 처리됐다.


10월 3일은 히가시쿠니 내각이 민주주의적 경향의 부활이라는 포츠담 선언의 목표를 실현하는데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야마자키 이와오 내무대신이 "반황실선전을 하는 자들은 체포한다, 천황제 폐지를 주장하는 자는 공산주의자로 간주하고 치안유지법에 따라 체포할 것이다"라고 발언했는가하면, 이와타 추조 사법대신도 국체의 변경에 대한 운동을 엄히 단속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사실 이 내각의 역사 인식은 8월 26일의 기자 회견과 9월 4일 88회 제국의회에서 행한 '종전에 이른 개요 보고'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바 있었다. 침략 전쟁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 데(패전) 대한 반성, '성단'을 통해 평화를 준 히로히토가 그 과정에서 얼마나 괴로워했을까에 대해 1억 신민이 반성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펼친 것이다.


결국 문제의 발언이 있었던 다음 날인 10월 4일 오후 6시, GHQ는 일본 정부에 인권지령을 내리게 된다. 인권지령은 사상·집회·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의 철폐, 정치범의 석방, 내무대신·경보국장·경시총감 등을 파면하고, 특별고등경찰(특고)를 폐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결국, 이 지령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히가시쿠니 내각은 5일 총사퇴했고, 10일 시데하라 내각이 출범하게 된다. 시데하라 내각의 출범은 10월 10일이므로 히가시쿠니 내각 대신들의 각료 신분은 법적으로는 9일까지 유지되었다.


1945년 8월 17일 출범한 히가시쿠니 내각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재임 기간 53일의 일본 역사상 최단명 내각이었다.


[참고문헌]

小森 陽一, 송태욱 역,『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서울: 뿌리와이파리, 2004.

구태훈, 『일본역사탐구』, 서울: 태학사, 2002.

俞天任, 박윤식 역,『대본영의 참모들』, 파주: 나남, 2014.

John W. Dower, 최은석 역, 『패배를 껴안고』, 서울: 민음사, 2009.


  1. 일본의 '황족'은 성이 없고, 대신 궁호를 사용하게 된다. [본문으로]
  2. 시게미츠 마모루의 자서전의 표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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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 최고사령부 GHQ(SCAP)

일본 2015.11.14 20:08 by 소노라

1945년 8월 30일, 연합군 최고사령관 겸 미 육군 태평양사령관 맥아더가 아츠기 비행장에 상륙했다. 이 날 미 육군 태평양사령부가 요코하마에 설치됐다. 이어 3일 후인 9월 2일 미주리호 함상에서 연합국과 일본의 항복 조인식이 열렸다. 10월 2일에는 도쿄 다이이치 생명관에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 본부가 설치됐는데, SCAP은 다이이치(제일) 생명 빌딩 외에도 여러 건물을 징발해 사용했다.


8월 13일, 포츠담 선언 수락 과정에서 일본국 덴노(天皇)와 정부는 연합군 최고사령관에 예속된다(subject to)[각주:1]는 연합국의 회신을 일본 정부가 받아들였다. 따라서 SCAP은 기존의 일본 정부와 관료 조직을 이용한 간접 통치 방식을 택하였음에도 양자의 관계는 상호 대등하지 않았다. SCAP은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기까지 6년여에 걸쳐 일본에서 정부 위의 정부로 군림했다. 


예를 들어 일본 내무성이 1945년 9월 27일 도쿄의 미국 대사관에서 있었던 맥아더와 히로히토의 첫 번째 회견 당시 촬영된 사진이 실린 신문을 불경하다며 판매 금지 처분하자 SCAP측에서 이를 취소한 적도 있었다.


한편, 1945년 10월 3일, 종전 처리를 위해 발족한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황족' 내각의 내무대신 야마자키 이와오가 치안유지법을 지속 적용할 뜻을 밝히자 다음 날 GHQ에서는 인권 지령을 내려 치안유지법 등 자유를 억압하는 법령의 폐지, 내무대신과 특별고등경찰 전원의 파면  10월 10일까지 정치범을 석방하도록 지시했다. 결국 10월 5일[각주:2] 히가시쿠니 내각은 총사직을 통해 붕괴됐다.


일본에서는 흔히 General Headquarters의 약자인 GHQ라고 부르는데 정식 영문 약칭은 SCAP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연합군 최고사령부와 미 육군 태평양사령부라는 두 개의 사령부가 존재했으며 이 두 사령부는 별개의 조직을 가졌다. 다만 일부는 두 사령부에서 겸직하는 사례도 있었다. 예를 들어 두 사령부 모두 사령관은 맥아더였으며, 참모장도 동일했다. 막료부에서는 SCAP 경제과학국장을 겸한 태평양육군 방공부장 마카트 소장과 같이 두 개의 사령부에서 부서장직을 겸하는 사례도 있었다.


SCAP의 조직은 시기마다 약간의 변동이 있었다예를 들어 1945년 12월 8일에는 도쿄 재판 준비를 위해 국제검사국(IPS)이 설치됐다. 다만, 사령관을 정점으로 참모장을 보좌하는 일반참모부(G1~G4)와 부참모장 예하의 특별참모부인 막료부(민정국·경제사회국·민간정보교육국 등)와 특정 문제를 다루는 임시위원회 조직 등이 존재했다.


기본적으로 SCAP의 통치는 기존의 일본 정부와 관료 조직을 활용한 간접 통치였다. SCAP의 공식 명령은 각서(SCAPIN, SCAP Index) 등의 형태를 취했지만 구두로 전달되는 경우도 많았다. 점령 후기 즈음에는 일본 측의 의사가 대부분 반영되었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영·중·소를 포함한 11개국으로 구성된 극동위원회의 설치가 결정됐다. 당초 소련은 극동위원회를 도쿄에 설치할 것을 주장했으나 워싱턴에 설치됐고, 대신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자문기관으로 미·영·중·소 4개국으로 구성된 대일이사회가 도쿄에 설치됐다. 대일이사회는 1946년 4월 5일부터 1952년 4월까지 164회가 열렸는데 1분 만에 폐회된 적도 자주 있었다. 


기본적으로 주요 연합4개국에 의한 분할점령이 이루어진 독일과 달리 일본은 사실상 미국에 의한 단독점령이 이루어졌다. 패전 직후 미국은 일본 분할 점령 방안을 검토해보기도 했으나 정식으로 채택되지는 못했다. 이 점에서 독일과 일본에 대한 점령 정책은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다.


점령 비용(종전 처리비)은 일본 정부의 몫이었는데 한 때 일본 전체 일반 예산의 3분의 1에 달했다.


[참고 자료]

1. 小森陽一, 송태욱 역, 『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서울: 뿌리와이파리, 2004.

2. John W. Dower, 최은석 역, 『패배를 껴안고』, 서울: 민음사, 2009.

3. 竹前栄治, 송병권 역, 『GHQ: 연합국 최고사령관 총사령부』, 서울: 평사리, 2011.

  1. 이 'subject to'의 번역에 대해서 외무성은 '제한된다'로 번역했고, 군부측은 '예속된다'로 번역하여 이렇게 되면 국체 유지(천황제 유지)는 불가능하다며 결사 항전을 주장하기도 했다. [본문으로]
  2. 후임 시데하라 내각이 10월 10일 성립되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10월 9일 해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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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지방자치: 정령지정도시

일본 2015.10.28 18:50 by 소노라

메이지 시기 도입된 시제정촌제(1888)에서 시정촌에는 주민 직선의 의회 제도가 도입됐다. 물론 지금과 같이 1인 1표를 행사하는 평등선거는 아니었다. 시에서는 3등급 선거 제도, 정촌에서는 2등급 선거제도가 시행됐다. 직접 시세 납세총액을 3등분해서 각각 의원을 1/3씩 선출했다. 즉, 납세액에 따라 행사할 수 있는 표의 가치가 달랐던 것이다.


정촌장은 정촌의회에서 선거를 통해 선출했다. 이렇게 선출된 정촌장은 의장을 겸했다. 그런데, 시장의 선출은 이와는 조금 달랐다. 시의회에서 후보자 3명을 추천하면 내무대신이 그 중 1명을 임명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1888년 원로원에서는 3대 도시(도쿄시, 오사카시, 교토시)에 대해서는 시제 적용을 반대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도쿄의 15개 구에서는 호적, 징세, 징병 등 사무를 연간 300만 건 이상 처리하고 있는데 이를 한 시청에서 처리하는 것은 어려우니, 도쿄를 여러 개의 시로 나누어 각각 시장, 시참사회, 시의회 등을 두고 부지사(府지사)가 총괄한다는 구상이었다. 결국 3대 도시에 대해서는 특례 제도가 도입되었다. 3대 도시에는 시장을 두지 않고, 부(府)지사가 시장의 직을 대신했다. 이 제도는 3대 도시 측의 폐지 운동 끝에 1898년 폐지됐다. 물론 나머지 도시의 시장도 지금의 시장과는 위상이 다르다. 1911년 제도 개편이 이루어질 때까지 시의 집행기관은 시장이 아니라 시참사회였기 때문이다.


1919년 제정된 도로법에서는 국도와 부현도로를 부현지사가 관리토록 했다. 그런데 칙령으로 지정된 시에 대해서는 그 시의 행정구역 내의 국도와 부현도로를 시장이 직접 관리하도록 했다.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 앞서 본 3대 도시에 요코하마시, 나고야시, 고베시를 합친 6대 도시이다. 또, 이들 6대 도시는 다양한 사업을 펼치는데 일일이 지사의 감독을 받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내무성에 특별시제의 도입을 건의했다. 결국, 1922년에 6대 도시 행정 감독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시의 고유 사무와 칙령으로 인정된 국가 위임 사무에 대해서는 6대 도시 측이 부현지사의 감독을 받지 않고, 바로 중앙 내무성의 감독을 받게 된 것이다. 이보다 1년 앞선 1921년에는 시정촌의 의회 선거방법이 변경됐다. 구체적으로 정촌에서는 등급 선거 제도가 폐지됐고, 시는 3등급 선거에서 2등급 선거로 완화된 것이다.


1926년에는 시제가 개정되었다. 정촌과 마찬가지로 시장을 시의회에서 직접 선출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으며, 등급 선거제도가 폐지됐다. 1943년에는 도쿄도제가 시행됐다. 도쿄부와 도쿄시가 도쿄도로 통합된 것이다. 도쿄시의 흔적은 현재 도쿄의 23 특별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47년 지방자치법이 제정되면서 특별시 제도가 도입됐다. 그 이전까지 일본에서는 지방자치법은 두지 않고, 시제·정촌제·부현제·군제·도쿄도제 등 여러 법령들이 병립하고 있었다. 지방자치법에서는 인구 50만 이상의 대도시 가운데 주민 과반이 찬성한 경우에는 그 도시를 법률로서 특별시로 지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또, 특별시는 도도부현의 구여겡서 제외하며 도도부현에 관한 규정을 적용한다고 되어 있었다. 즉, 특별시가 되는 것은 도도부현에서 분리되어 도도부현과 동격의 광역자치단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와 관련해 5대 도시(도쿄시는 이미 폐지되었기 때문) 측과 부현의 갈등이 빚어졌다. 특별시 승격 주민투표의 선거권자에 대한 해석이 엇갈렸다. 대도시 측은 대도시 시민만이 대상이라고 보았고, 부현에서는 부현 주민 전체가 선거권자라고 보았다. 결국, 1956년 지방자치법을 개정해 특별시 제도를 폐지했다. 다만, 대도시 행정의 특수성은 인정되어 대신 정령지정도시 제도를 도입했다. 원래 정령지정도시는 이들 5대 도시에 대한 특례로 적용된 성격이 강했지만 1963년 키타큐슈시의 지정을 시작으로 현재 20개 도시가 지정되어 있다.


현재, 일본의 지방자치단체에는 각종 행정위원회가 집행기관으로 설치되어 있다. 이들은 법에 따라 반드시 설치되며, 시장과는 병립한다. 다만, 실질적으로는 시장이 이들 행정위원회보다 우위에 있다. 예컨대, 행정위원회는 의회에 예산안을 제출할 수 없으며 반드시 시장을 통해야만 한다. 그런데 행정위원회는 도도부현에 설치되는 것과 시정촌에 두어야 하는 것이 다르다. 정령지정도시는 시정촌에 속하지만, 도도부현에 가까운 예우를 받는다. 예를 들어, 도도부현에는 인사위원회를 두고, 시정촌에는 기본적으로 공평위원회를 두어야 하지만, 정령지정도시는 인사위원회를 두도록 되어 있는 것이 그것이다. 또, 정령지정도시의 교육위원 역시 도도부현과 같은 6명을 두도록 되어 있다. 특히, 시정촌 교육위원회는 교원에 대한 인사권을 갖지 못한다. 교원에 대한 인사권은 도도부현 교육위원회에서 가진다. 그런데, 정령지정도시 교육위원회는 시정촌 교육위원회이지만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다. 특이한 점은, 인사권은 정령지정도시 교육위원회에서 행사하지만, 교원에 대한 급여는 도도부현에서 지급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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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과 일본외교를 읽다

서평 2015.10.24 16:39 by 소노라

기타오카 신이치, 조진구 역, 『유엔과 일본외교』, 서울: 전략과문화, 2009.

  (北岡伸一, 『国連の政治力学 : 日本はどこにいるのか』, 東京: 中央公論新社, 2007.)


이 책의 저자인 기타오카 신이치(北岡 伸一)는 학자 출신으로 주유엔 일본 차석대사를 지낸 사람이다.

이 책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면, 유엔이 운영되는 모습과 그 곳에서의 일상을 다룬 전반부와 일본 외교관답게 일본이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역설한 후반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전반부는 나쁘지 않았다. 특히 대개 예산을 편성할 때는 어느 정도 수입이 들어올 것인지를 예측하고 지출을 결정하는 데 비해, 유엔은 지출을 먼저 결정하고, 필요 경비에 따라 분담금을 결정하는 체제라는 점 등 내가 잘 몰랐던 여러 부분들을 알게 되었다.


그에 비해 후반부는 그렇게까지 즐겁고 편한 느낌으로 읽지는 못했다. 일본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강하게 반대하는 한국과 중국에 대해 저자는 전쟁 책임자를 처벌하고, 국경을 다시 정하고, 배상금을 지불하면 그것으로 전후 처리는 끝나는 것이다. 일본은 이 모든 것을 다 했다면서 60년 이상이나 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며, 이것이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에 반대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사실은 어떠한가? "전쟁 책임자의 처벌", "국경의 재획정", "배상금 지불" 이 세 가지 중에서 제대로 이루어진 것은 무엇인가? 배상금 지불 정도뿐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저자는 한일간의 유엔 분담금은 10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며 한국이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반대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한 시각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후반부는 편향된 시각을 보여준다. 저자가 유엔 최일선에서 근무했던 만큼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사실 이 책은 일본 내에서 자국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반대하는 여론을 설득하기 위해 만들어진 책 같기도 하다.


확실히 읽으면서 유쾌한 기분으로 읽을수 있는 책은 아니지만 일본의 논리와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읽을 가치가 있었던 책이었다. 일본의 생각을 엿 볼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책이 한국에 더 많이 소개되고 번역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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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 사고 조사하면 역시 블랙박스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사실 블랙박스라는 것은 이름 그대로 검은색도 아니고 하나의 장치도 아닙니다. 블랙박스는 크게 비행기록장치(FDR)와 조종실 음성기록장치(CVR)로 나뉩니다. 조종실 음성기록장치는 그 명칭대로 조종사간의 대화를 녹음, 저장함으로써 사고 분석에 큰 도움을 주는 장치로 30분을 주기로 해서 30분 이전의 녹음 내용은 삭제되고, 다음 내용이 저장되는 방식이기 때문에 언제나 사고 직전 30분부터의 대화를 들을 수 있습니다. 물론 최근 저장 매체가 발달하면서 1시간 넘게 저장 가능한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조종실 음성기록장치에 녹음된 내용을 분석한 값 즉, 대화 내용 (엄밀히 말하면 대화 내용뿐만 아니라 조종실 경보음, 교신 내용등도 녹음됩니다.)는 사고보고서에 부록 같은 형식으로 기재되어 일반에도 공개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실제 녹음 내용 즉, 조종사들의 육성이 공개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최후의 30초 정도가 공개되는 수준이랄까.

그런데 거의 유일하게 최후의 30분간 실제 육성이 전부 공개된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일본항공 123편 사고입니다. 
1985년 8월 12일 일어난 일본항공 123편 사고는 520명의 사망자를 냈습니다. 엄청난 사망자를 낸 사고인만큼 123편 사고에는 사상 최악의 단일 항공사고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습니다. 단일 항공사고라는 표현을 사용 한 것은 최악의 항공 사고는 테네리페 참사라고도 불리는 팬암기와 KLM기 충돌 사고이기 때문입니다.

2000~2001년 즈음 모종의 경로로 일본 방송국을 통해 유출되었습니다. 원본은 일본웹에 있던 플래시인데 해당 사이트가 현재 접속이 불가능하다는 점은 유감입니다.


 

 
 
 

사고기의 기장(49세), 부기장(39세), 항공기관사(46세) 및 치프퍼서(39세)의 사고 전 사진.


플래시를 보려면 더보기를 클릭.

>더보기


최초 작성 2009.03.17 20:27
1차 일부 변경 2010.03.10
2차 일부 변경 2010.11.22
3차 일부 변경 2010.11.24
4차 전부 변경 2011.01.03
5차 일부 변경 2011.01.08
6차 일부 변경 2011.06.03
7차 일부 변경(플래시 파일교체) 2011.07.03
8차 일부 변경 2011.07.15
9차 전부 변경 2012.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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