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노라 송신소

강대국 국제정치의 비극은 지난 2001년 출간된 존 미어샤이머의 The Tragedy of Great Power Politics의 한국어 번역판이다. 번역판 출간연도는 2004년.


국제정치학은 크게 자유주의(이상주의) 진영과 현실주의 진영으로 양분할 수 있다. 국가간의 교류가 활발해질수록 세계는 평화로워질 것이라는 주장이나, 민주주의는 평화를 가져온다는 민주평화론 등은 대표적인 자유주의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세계를 평화롭게 만드는 것은 현실적이진 않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들이 바로 현실주의자들이다. 물론 궂은 날씨가 하루 종일 비 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것 처럼, 평화롭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 항상 전쟁 상태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주의는 다시 한스 모겐소의 고전 현실주의와 케네스 월츠(왈츠)의 신현실주의로 나뉜다. 고전 현실주의는 국제분쟁의 원인으로 인간의 본성을 든다. 반면, 신현실주의는 무정부상태라는 국제정치의 구조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따라서 구조 현실주의라고도 한다. 


미어샤이머는 이 구조 현실주의에 속하는 학자다. 물론, 미어샤이머와 월츠의 이론에는 중대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월츠의 이론에서 국가들은(대개 강대국) 일정한 정도의 힘에 도달하면 더 이상의 힘의 추구를 주저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하지만, 미어샤이머는 힘이 안보를 보장하는 최선의 방법인 세상에서, 안보를 보장받는 최선의 방법은 패권국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국가(특히, 강대국)들은 패권국이 될 때까지 힘을 갈망하게 된다.


미어샤이머는 이러한 자신의 이론과 월츠의 이론을 구별하기 위해 전자를 공격적 현실주의(공세적 현실주의), 후자를 방어적 현실주의(수세적 현실주의)로 구분 짓는다.


미어샤이머는 안보를 보장받는 최선의 방법은 "지금 바로 패권국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전 지구적 패권국이 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미어샤이머는,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세계적 차원의 패권국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상호확증파괴(MAD)라는 말이 있다. 냉전기 공포의 핵균형을 잘 나타내주는 단어다. 미쳤다는 뜻의 mad와도 동음이의어다.(일부러 그렇게 만든 두문자약어겠지만) 미국과 소련 두 나라 중 어느 나라도 먼저 선제 공격을 통해 상대방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는 능력(제1타격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반면, 상대방으로부터 공격을 당할 경우, 당한 만큼 되돌려줄 정도의 보복력(제2타격력)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먼저 공격을 하더라도 상대를 궤멸시킬 수 없을뿐더러, 내가 준 만큼 되돌려 받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 공포의 핵균형이 돌아가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한 나라가 선제 공격을 통해 상대방을 완전히 초토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또는 상대방의 보복 공격을 완전히 무효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그 나라는 핵 우위에 서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나라는 세계적 패권국이 될 것이다. "핵 패권국"에게 "재래식 군사력의 균형이란 무의미"하다.


핵 패권을 통해 세계적 패권국이 된다는 꿈은 꿈이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상황이 아니다. 그렇다면 재래식 군사력을 통해 세계적 패권국이 될 수 있을까? 미어샤이머는 이 또한 불가능하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것은 역시 바다(특히, 대양)의 힘이다.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바다를 건너서 대규모 병력을 전개하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설령,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은 더 유리한 위치에서 전쟁에 임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미어샤이머는 강대국들의 목표는 지역 패권국이 되는 것이 목표[각주:1]라고 말한다. 패권국은 다른 대륙에 대해 역외균형자(offshore balancer)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그 이유는 다른 패권국이 자기 대륙 앞마당에서 세력균형 상태에 영향을 주어서, 자신의 패권적 지위를 망쳐놓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강대국들이 서로를 견제하는 방법에는 유화, 편승, 책임전가, 세력균형 등의 방법이 있다. 일반적으로 강대국이 강대국을 견제할 때는 세력균형의 방법이 자주 사용된다고 한다. 그러나 미어샤이머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오히려 역사를 볼 때, 자주 사용된 것은 다른 나라에 책임을 떠넘기는 전략(책임전가 전략)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전략은 국제정치의 구조(강대국의 숫자)와 관련이 있다. 단극체제 즉, 단일 강대국이 존재하는 체제는 세계적 패권국이 존재하는 체제인데 이것은 실현 불가능하다. 강대국이 두 나라가 존재하는 것은 양극체제로, 냉전이 대표적이다.


강대국이 세 나라 이상 존재하면 다극체제로 분류된다. 미어샤이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잠재적 패권국이 포함된 불균형적 다극체제와, 잠재적 패권국이 없는 균형적 다극체제로 구분한다. 이론적으로 양극체제 역시 균형적 양극체제와 불균형적 양극체제로 구별할 수 있겠지만, 불균형적 양극체제라면 곧 단극체제가 될 것이므로 무의미한 구분이 될 것이다.


체제 내에 책임을 떠넘길 다른 강대국이 존재하는 다극체제라면 책임전가의 유혹에 빠지기 쉽지만, 책임을 전가할 제3의 강대국이 없는 양극체제에서는 직접 상대와 세력균형을 맞출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다. 원본이 나온게 2001년이다. 이 책도 지난 2014년 개정판(Updated Edition)이 출판(번역 안됨)됐다. 전반적인 내용의 변화는 없지만, 중국의 부상에 대해 다룬 마지막 장에서 최근 15년간 있었던 여러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다루어지고 있다.

  1. 미어샤이머는 미국 역시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지역 패권국이라고 본다. 그리고 현대에서 지역 패권국이라는 지위를 차지한 것은 미국이 유일하다고 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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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7월 26일, 주요 3대 연합국(미국·영국·중국)의 명의로 포츠담 선언이 발표된다.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과 소련간의 중립조약이 유효했기 때문에, 소련을 통한 강화 협상(조건부 항복) 공작이 진행되고 있었다. 따라서 29일 오후 4시, 스즈키 간타로 수상은 이를 묵살한다는 '문제 발언'을 하게 된다. 일부에서는 이것이 번역의 문제였다고 이야기하고는 한다. 그러나 "포츠담 선언에는 별 가치가 없다, 전쟁 완수에 매진하겠다"는 문맥을 볼때 이것이 오역 문제가 아님은 분명해진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다. 이것이 원폭이라는 미국 측 발표에 의심을 갖던 일본 정부가 원폭임을 확인한 것은 8일이었다. 9일 오전 6시, 사코미즈 히사츠네 내각 서기관장에게 소련의 중립조약 파기 다시 말해, 소련의 대일전 참전 소식이 전달된다. 오전 10시 30분에 열린 최고전쟁지도회의가 30분 가량 진행됐을 무렵인 11시 2분에는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투하된다.

 

최고전쟁지도회의는 1944년 8월 4일 기존의 대본영정부연락회의를 대체해 새롭게 설치된 회의체였지만 연락회의와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대본영정부연락회의는 1937년 11월 처음 열렸는데 출석자는 정부에서는 내각총리대신(수상), 육군대신(육상), 해군대신(해상), 외무대신(외상)이, 대본영 측에서는 (육군)참모총장, (해군)군령부총장 등으로 내각과 통수부간의 의견을 조정하기 위해 개최된 것이다.

 

그러나 이 최고전쟁지도회의에서도 결론이 나지 않게 되자, 오후 11시 50분 히로히토가 참석한 가운데 어전 회의가 열리게 된다. 어전회의에는 추밀원 의장인 히라누마 기이치로, 내각 서기관장 사코미즈 히사츠네, 해군 군무국장 호시나 젠시로 등이 배석했다.

 

어전회의에서도 포츠담 선언의 수락을 둘러싸고 3대3의 팽팽한 대립 구도를 보이게 된다. 결국 10일 오전 2시, 스즈키 수상은 히로히토에게 성단을 요청하는데, 여기서 히로히토는 자신이 도고 외상과 생각이 같다고 말함으로써 포츠담 선언의 수락이라는 대방향이 정해지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히로히토의 1차 성단이다. 그렇다고 히로히토는 평화주의자였으며 군부에 끌려갔을 뿐이라는 식의 인식은 곤란하다.

 

정권 핵심에서 결단을 내려 달라는 요구가 나온 것은 이미 지난 2월이었다. 3차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으며 훗날 GHQ에 의해 전범 혐의자로 지목되자 자살하게 되는 고노에 후미마로가 패전은 이미 필지라는 상주문을 올린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히로히토는 더 큰 전과를 올린 후가 아니면 어렵다며 거절의 뜻을 밝혔고 그 결과로 수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아무런 의미 없이 스러져갔던 것이다.

 

10일 오전 7시, 중립국인 스위스와 스웨덴을 통해 포츠담 선언의 4대 연합국(미국·영국·중국·소련)에게 통보된다. 그 조건은 천황의 통치 대권에 수정을 가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였다.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번스 국무장관, 스팀슨 육군장관, 포레스탈 해군장관 등과 함께 회의를 열었고 일본에 대한 회신안 초안이 완성됐다. 이 초안은 다시 포츠담 선언의 다른 세 연합국 즉, 영국·중국·소련에게 전달된다. 소련은 전후 일본 점령에 대해 미국과 소련이 각각 최고사령관을 파견한다는 조건을 들었지만 이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렇게 전달된 연합국측의 회신은 다시 일본 정부에 분열을 가져오게 된다. subject to라는 부분이 문제가 된 것인데, 외무성은 군부를 의식해 이를 '(천황과 일본 정부의 통치권은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제한하에 둔다'로 번역했지만, 군부 측은 이를 '예속된다'로 번역하고 국체 유지가 불가능해지므로 1억 총옥쇄를 주장한 것이다. 이 13일의 회의에서도 다시 3대3으로 의견이 분열될 조짐을 보이자 14일 오전 11시, 다시 어전회의가 열린다. 여기서 히로히토는 최후의 선언을 내리게 된다. 바로 두 번째 성단이다.

 

2차 성단이 내려지자 종전 조서의 작성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몇 가지 수정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은 전세는 날로 불리해졌다는 부분이 전국은 호전되지 않았다로 수정된 것이다. 이 부분은 아나미 육군대신의 강력한 반발로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의 발표는 모두 거짓말이 되는 것이니, 우리는 전쟁에 패한 것이 아니라 전국이 호전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주장한 것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14일 오후 9시에는 라디오를 통해 내일 오전 중대 방송이 있을 것임이 알려진다. 그리고 밤 11시 20분부터 황궁에서 히로히토가 직접 녹음을 마쳤다. 두 장의 음반에는 5분 분량의 히로히토의 목소리가 담겨졌다. 이 음반들은 다음날 방송때까지 도쿠가와 의전비서가 보관했는데 일부 군부 인사가 이 음반을 탈취하려는 궁성 사건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15일 오전 7시 21분에는 전날 밤의 중대 방송이 히로히토의 직접 방송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정오에 히로히토의 목소리가 전파를 타게 된다. 사실 천황의 목소리가 전파를 타게 된 것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첫번째는 '사고에 의한 것'이었던만큼, 사실상 첫번째가 되는 셈이다. 당시 일반인들이 사용하지 않는 용어와 히로히토의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바로 이것을 알아들은 사람은 드물었고 이후 아나운서의 설명을 통해 일본의 패전 소식을 알게 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재밌는 점은 메이지 헌법 체제의 붕괴가 이 때를 포함해 2차 대전 시기에 매우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원래 포츠담 선언의 수락에 대한 결정은 추밀원의 자순사항에 상당하지만,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저 추밀원 의장이 어전회의에 참석하는 것으로 갈음했을 뿐이다. 진주만 공습 당시에도, 선전 포고에 대한 자순권을 갖고 있던 추밀원은 사후 추인 기관에 지나지 않았다. 내각 역시 최고전쟁지도회의에서 이루어진 결정을 형식적으로 추인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참고문헌]

小森陽一, 송태욱 역, 『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서울: 뿌리와이파리, 2004.
Stephen Walker, 권기대 역, 『카운트다운 히로시마』, 서울: 황금가지, 2005.
吉田 裕, 최혜주 역, 『아시아태평양전쟁』, 서울: 어문학사, 2012.
石川 眞澄, 박정진 역, 『일본 전후정치사』, 서울: 후마니타스, 2006.
半藤 一利, 이정현 역, 『일본의 가장 긴 하루』, 서울: 가람기획,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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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후의 전시내각인 스즈키 간타로 내각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던 8월 14일,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는 내각을 맡으라는 소식을 전해 받는다.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는 황족 출신으로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의 아들이며 히로히토에게는 고모부가 된다.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는 육군대장으로 1941년부터 방위총사령관과 군사참의관을 지냈다. 이처럼 일제의 남자 '황족'은 군인 출신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는 1910년 황족신위령(皇族身位令)에 따라 육해군의 무관(장교)로 임관해야 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히가시쿠니는 전시에도 내각총리대신 하마평에 오른 적이 있었다. 1941년 10월, 제3차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이 사퇴하자 후임 총리 하마평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히로히토의 의지에 따라, 도조 히데키를 수장으로 하는 내각이 출범했다.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는 내각을 맡아달라는 요청에 대해 거부감을 보였지만 결국 받아들인다. 참고로 보통 내각책임제 국가에서는 단독 과반을 획득한 제1당의 당수가 총리직을 맡는 것이 관례다. 그런데 당시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는 그런 위치에 있지도 않았으며, 의원 신분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총리직을 맡을 수 있었을까? 당시 일본 정치의 기본구조는 메이지 헌법을 따랐다. 즉, 의원 신분이나 당수가 아니라고 해도 덴노의 명이 있으면 총리를 맡아 내각을 꾸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당시 일본 정치의 특이한 점 중 하나인데 이를 대명강하라고 부른다.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는 1947년 신적강하를 통해 황적에서 이탈하면서 히가시쿠니라는 성을 창설[각주:1]하게 된다. 즉, 1945년 8월 당시까지는 아직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가 왕(王)으로서 황족 신분에 있었으므로, 이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은 '황족 내각'이 되는 셈이다. 이 내각은 일본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황족 내각이었으며 또 최단명 내각(53일)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히가시쿠니 내각이 공식 출범한 건 8월 17일이었다. 우선 과제중 하나는 항복이 확정된 이상 항복문서에 누가 서명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당초 일부 연합국에서는 히로히토가 직접 서명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시게미츠 마모루 외무대신과 우메즈 요시지로 참모총장이 각각 일본 덴노/정부와 대본영을 대표해 "일본 개벽 이래 불명예인 문서에 이름을 써넣"[각주:2]게 되었다.

한편, 9월 18일 히가시쿠니는 외국인 기자들에게 일본이 직접 전범을 처벌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외무대신이던 시게미츠가 전범 혐의자들을 일본 정부가 직접 재판하겠다는 뜻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에 전달했다가 거절 당한 직후였다. 실제로 1945년 9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일본 정부는 전범혐의자 8명에 대한 재판을 진행했는데, 당연하게도 훗날 이 재판은 GHQ에 의해 무효로 처리됐다.

10월 3일은 히가시쿠니 내각이 민주주의적 경향의 부활이라는 포츠담 선언의 목표를 실현하는데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야마자키 이와오 내무대신이 "반황실선전을 하는 자들은 체포한다, 천황제 폐지를 주장하는 자는 공산주의자로 간주하고 치안유지법에 따라 체포할 것이다"라고 발언했는가하면, 이와타 추조 사법대신도 국체의 변경에 대한 운동을 엄히 단속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사실 이 내각의 역사 인식은 8월 26일의 기자 회견과 9월 4일 88회 제국의회에서 행한 '종전에 이른 개요 보고'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바 있었다. 침략 전쟁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 데(패전) 대한 반성, '성단'을 통해 평화를 준 히로히토가 그 과정에서 얼마나 괴로워했을까에 대해 1억 신민이 반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결국 문제의 발언이 있었던 다음 날인 10월 4일 오후 6시, GHQ는 일본 정부에 인권지령을 내리게 된다. 인권지령은 사상·집회·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의 철폐, 정치범의 석방, 내무대신·경보국장·경시총감 등을 파면하고, 특별고등경찰(특고)를 폐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결국, 이 지령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히가시쿠니 내각은 5일 총사퇴했고, 10일 시데하라 내각이 출범하게 된다. 시데하라 내각의 출범은 10월 10일이므로 히가시쿠니 내각 대신들의 각료 신분은 법적으로는 9일까지 유지되었다.

1945년 8월 17일 출범한 히가시쿠니 내각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재임 기간 53일의 일본 역사상 최단명 내각이었다.

[참고문헌]

小森 陽一, 송태욱 역,『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서울: 뿌리와이파리, 2004.

구태훈, 『일본역사탐구』, 서울: 태학사, 2002.

俞天任, 박윤식 역,『대본영의 참모들』, 파주: 나남, 2014.

John W. Dower, 최은석 역, 『패배를 껴안고』, 서울: 민음사, 2009.


  1. 일본의 '황족'은 성이 없고, 대신 궁호를 사용하게 된다. [본문으로]
  2. 시게미츠 마모루의 자서전의 표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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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 최고사령부 GHQ(SCAP)

일본 2015.11.14 20:08 by 소노라

1945년 8월 30일, 연합군 최고사령관 겸 미 육군 태평양사령관 맥아더가 아츠기 비행장에 상륙했다. 이 날 미 육군 태평양사령부가 요코하마에 설치됐다. 이어 3일 후인 9월 2일 미주리호 함상에서 연합국과 일본의 항복 조인식이 열렸다. 10월 2일에는 도쿄 다이이치 생명관에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 본부가 설치됐는데, SCAP은 다이이치(제일) 생명 빌딩 외에도 여러 건물을 징발해 사용했다.


8월 13일, 포츠담 선언 수락 과정에서 일본국 덴노(天皇)와 정부는 연합군 최고사령관에 예속된다(subject to)[각주:1]는 연합국의 회신을 일본 정부가 받아들였다. 따라서 SCAP은 기존의 일본 정부와 관료 조직을 이용한 간접 통치 방식을 택하였음에도 양자의 관계는 상호 대등하지 않았다. SCAP은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기까지 6년여에 걸쳐 일본에서 정부 위의 정부로 군림했다. 


예를 들어 일본 내무성이 1945년 9월 27일 도쿄의 미국 대사관에서 있었던 맥아더와 히로히토의 첫 번째 회견 당시 촬영된 사진이 실린 신문을 불경하다며 판매 금지 처분하자 SCAP측에서 이를 취소한 적도 있었다.


한편, 1945년 10월 3일, 종전 처리를 위해 발족한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황족' 내각의 내무대신 야마자키 이와오가 치안유지법을 지속 적용할 뜻을 밝히자 다음 날 GHQ에서는 인권 지령을 내려 치안유지법 등 자유를 억압하는 법령의 폐지, 내무대신과 특별고등경찰 전원의 파면  10월 10일까지 정치범을 석방하도록 지시했다. 결국 10월 5일[각주:2] 히가시쿠니 내각은 총사직을 통해 붕괴됐다.


일본에서는 흔히 General Headquarters의 약자인 GHQ라고 부르는데 정식 영문 약칭은 SCAP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연합군 최고사령부와 미 육군 태평양사령부라는 두 개의 사령부가 존재했으며 이 두 사령부는 별개의 조직을 가졌다. 다만 일부는 두 사령부에서 겸직하는 사례도 있었다. 예를 들어 두 사령부 모두 사령관은 맥아더였으며, 참모장도 동일했다. 막료부에서는 SCAP 경제과학국장을 겸한 태평양육군 방공부장 마카트 소장과 같이 두 개의 사령부에서 부서장직을 겸하는 사례도 있었다.


SCAP의 조직은 시기마다 약간의 변동이 있었다예를 들어 1945년 12월 8일에는 도쿄 재판 준비를 위해 국제검사국(IPS)이 설치됐다. 다만, 사령관을 정점으로 참모장을 보좌하는 일반참모부(G1~G4)와 부참모장 예하의 특별참모부인 막료부(민정국·경제사회국·민간정보교육국 등)와 특정 문제를 다루는 임시위원회 조직 등이 존재했다.


기본적으로 SCAP의 통치는 기존의 일본 정부와 관료 조직을 활용한 간접 통치였다. SCAP의 공식 명령은 각서(SCAPIN, SCAP Index) 등의 형태를 취했지만 구두로 전달되는 경우도 많았다. 점령 후기 즈음에는 일본 측의 의사가 대부분 반영되었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영·중·소를 포함한 11개국으로 구성된 극동위원회의 설치가 결정됐다. 당초 소련은 극동위원회를 도쿄에 설치할 것을 주장했으나 워싱턴에 설치됐고, 대신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자문기관으로 미·영·중·소 4개국으로 구성된 대일이사회가 도쿄에 설치됐다. 대일이사회는 1946년 4월 5일부터 1952년 4월까지 164회가 열렸는데 1분 만에 폐회된 적도 자주 있었다. 


기본적으로 주요 연합4개국에 의한 분할점령이 이루어진 독일과 달리 일본은 사실상 미국에 의한 단독점령이 이루어졌다. 패전 직후 미국은 일본 분할 점령 방안을 검토해보기도 했으나 정식으로 채택되지는 못했다. 이 점에서 독일과 일본에 대한 점령 정책은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다.


점령 비용(종전 처리비)은 일본 정부의 몫이었는데 한 때 일본 전체 일반 예산의 3분의 1에 달했다.


[참고 자료]

1. 小森陽一, 송태욱 역, 『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서울: 뿌리와이파리, 2004.

2. John W. Dower, 최은석 역, 『패배를 껴안고』, 서울: 민음사, 2009.

3. 竹前栄治, 송병권 역, 『GHQ: 연합국 최고사령관 총사령부』, 서울: 평사리, 2011.

  1. 이 'subject to'의 번역에 대해서 외무성은 '제한된다'로 번역했고, 군부측은 '예속된다'로 번역하여 이렇게 되면 국체 유지(천황제 유지)는 불가능하다며 결사 항전을 주장하기도 했다. [본문으로]
  2. 후임 시데하라 내각이 10월 10일 성립되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10월 9일 해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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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지방자치: 정령지정도시

일본 2015.10.28 18:50 by 소노라

메이지 시기 도입된 시제정촌제(1888)에서 시정촌에는 주민 직선의 의회 제도가 도입됐다. 물론 지금과 같이 1인 1표를 행사하는 평등선거는 아니었다. 시에서는 3등급 선거 제도, 정촌에서는 2등급 선거제도가 시행됐다. 직접 시세 납세총액을 3등분해서 각각 의원을 1/3씩 선출했다. 즉, 납세액에 따라 행사할 수 있는 표의 가치가 달랐던 것이다.


정촌장은 정촌의회에서 선거를 통해 선출했다. 이렇게 선출된 정촌장은 의장을 겸했다. 그런데, 시장의 선출은 이와는 조금 달랐다. 시의회에서 후보자 3명을 추천하면 내무대신이 그 중 1명을 임명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1888년 원로원에서는 3대 도시(도쿄시, 오사카시, 교토시)에 대해서는 시제 적용을 반대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도쿄의 15개 구에서는 호적, 징세, 징병 등 사무를 연간 300만 건 이상 처리하고 있는데 이를 한 시청에서 처리하는 것은 어려우니, 도쿄를 여러 개의 시로 나누어 각각 시장, 시참사회, 시의회 등을 두고 부지사(府지사)가 총괄한다는 구상이었다. 결국 3대 도시에 대해서는 특례 제도가 도입되었다. 3대 도시에는 시장을 두지 않고, 부(府)지사가 시장의 직을 대신했다. 이 제도는 3대 도시 측의 폐지 운동 끝에 1898년 폐지됐다. 물론 나머지 도시의 시장도 지금의 시장과는 위상이 다르다. 1911년 제도 개편이 이루어질 때까지 시의 집행기관은 시장이 아니라 시참사회였기 때문이다.


1919년 제정된 도로법에서는 국도와 부현도로를 부현지사가 관리토록 했다. 그런데 칙령으로 지정된 시에 대해서는 그 시의 행정구역 내의 국도와 부현도로를 시장이 직접 관리하도록 했다.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 앞서 본 3대 도시에 요코하마시, 나고야시, 고베시를 합친 6대 도시이다. 또, 이들 6대 도시는 다양한 사업을 펼치는데 일일이 지사의 감독을 받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내무성에 특별시제의 도입을 건의했다. 결국, 1922년에 6대 도시 행정 감독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시의 고유 사무와 칙령으로 인정된 국가 위임 사무에 대해서는 6대 도시 측이 부현지사의 감독을 받지 않고, 바로 중앙 내무성의 감독을 받게 된 것이다. 이보다 1년 앞선 1921년에는 시정촌의 의회 선거방법이 변경됐다. 구체적으로 정촌에서는 등급 선거 제도가 폐지됐고, 시는 3등급 선거에서 2등급 선거로 완화된 것이다.


1926년에는 시제가 개정되었다. 정촌과 마찬가지로 시장을 시의회에서 직접 선출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으며, 등급 선거제도가 폐지됐다. 1943년에는 도쿄도제가 시행됐다. 도쿄부와 도쿄시가 도쿄도로 통합된 것이다. 도쿄시의 흔적은 현재 도쿄의 23 특별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47년 지방자치법이 제정되면서 특별시 제도가 도입됐다. 그 이전까지 일본에서는 지방자치법은 두지 않고, 시제·정촌제·부현제·군제·도쿄도제 등 여러 법령들이 병립하고 있었다. 지방자치법에서는 인구 50만 이상의 대도시 가운데 주민 과반이 찬성한 경우에는 그 도시를 법률로서 특별시로 지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또, 특별시는 도도부현의 구여겡서 제외하며 도도부현에 관한 규정을 적용한다고 되어 있었다. 즉, 특별시가 되는 것은 도도부현에서 분리되어 도도부현과 동격의 광역자치단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와 관련해 5대 도시(도쿄시는 이미 폐지되었기 때문) 측과 부현의 갈등이 빚어졌다. 특별시 승격 주민투표의 선거권자에 대한 해석이 엇갈렸다. 대도시 측은 대도시 시민만이 대상이라고 보았고, 부현에서는 부현 주민 전체가 선거권자라고 보았다. 결국, 1956년 지방자치법을 개정해 특별시 제도를 폐지했다. 다만, 대도시 행정의 특수성은 인정되어 대신 정령지정도시 제도를 도입했다. 원래 정령지정도시는 이들 5대 도시에 대한 특례로 적용된 성격이 강했지만 1963년 키타큐슈시의 지정을 시작으로 현재 20개 도시가 지정되어 있다.


현재, 일본의 지방자치단체에는 각종 행정위원회가 집행기관으로 설치되어 있다. 이들은 법에 따라 반드시 설치되며, 시장과는 병립한다. 다만, 실질적으로는 시장이 이들 행정위원회보다 우위에 있다. 예컨대, 행정위원회는 의회에 예산안을 제출할 수 없으며 반드시 시장을 통해야만 한다. 그런데 행정위원회는 도도부현에 설치되는 것과 시정촌에 두어야 하는 것이 다르다. 정령지정도시는 시정촌에 속하지만, 도도부현에 가까운 예우를 받는다. 예를 들어, 도도부현에는 인사위원회를 두고, 시정촌에는 기본적으로 공평위원회를 두어야 하지만, 정령지정도시는 인사위원회를 두도록 되어 있는 것이 그것이다. 또, 정령지정도시의 교육위원 역시 도도부현과 같은 6명을 두도록 되어 있다. 특히, 시정촌 교육위원회는 교원에 대한 인사권을 갖지 못한다. 교원에 대한 인사권은 도도부현 교육위원회에서 가진다. 그런데, 정령지정도시 교육위원회는 시정촌 교육위원회이지만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다. 특이한 점은, 인사권은 정령지정도시 교육위원회에서 행사하지만, 교원에 대한 급여는 도도부현에서 지급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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