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노라 송신소

전진훈의 역설

일본 2017.01.02 21:18 by 소노라

1941년 1월 8일 당시 육군 대신이던 도조 히데키는 전진훈을 공포한다. 특히, 전진훈 2장 8조에는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고 되어 있다.


1945년 9월, 도조는 자신에 대한 체포 명령이 내려지자 권총 자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당시에도 이와 관련해 논란이 많았다. 첫째는 그 시기가 너무 늦었다는 점이다. 패전 각의에 서명한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대신이 8월 15일 새벽에 할복 자살한 점을 고려할 때, 도조의 자살 시도는 뒤늦은 감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것이 지탄받았던 큰 이유는 도조가 칼로 할복 자살한 것이 아니라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가슴을 권총으로 쏘았다는 점이 큰 지탄의 이유가 되었다. 일각에서는 도조가 진심으로 자살할 마음은 없고, 그저 보여 주기 위해 총을 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다.


이후, 도조 히데키는 병원에서 (미군 병사의)수혈과 치료를 받았다. 여기서 그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신고

'일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진훈의 역설  (0) 2017.01.02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2) 2016.08.18
전범은 우리가 직접 처벌한다  (0) 2016.08.14
대명강하  (0) 2016.08.13
군부대신 현역무관제  (0) 2016.08.12
가타야마 내각  (0) 2016.08.10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일본 2016.08.18 20:09 by 소노라

1945년 9월 20일,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의 외무대신 요시다 시게루가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를 방문한다. 요시다는 맥아더로부터 히로히토의 비공식 방문은 부적절하지 않으며, 오히려 환영한다는 뜻을 확인한다. 이어 후지타 히사노리 시종장이 맥아더를 방문한다. 후지타는 맥아더에게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성실히 이행할 의사가 있음을 알리고 싶다는 히로히토의 뜻을 전달한다. 이렇게 해서 9월 27일 오전 10시 무렵, 주일 미국 대사관에서 맥아더와 히로히토간의 첫 번째 회담이 열리게 된다.


맥아더와 히로히토는 사진을 세 번 찍고는 대화를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이 사진이 불경하다는 이유로 신문 게재를 금지하지만,

GHQ가 이 조치를 철회시킨다.





1961년, 후지타는 자신의 회고록(『시종장의 회상』[각주:1])에서 히로히토가


"(전쟁) 책임은 모두 나에게 있다.
문무백관은 내가 임명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책임이 없다.
나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 없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히로히토를 수행했던 후지타 시종장과 이시와타 궁내대신 등은 다른 방에서 대기했다. 따라서 후지타는 맥아더와 히로히토의 대화 내용을 직접 들을 수 있었던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후지타는 위의 발언은, 회담이 끝난 후 속기록에서 본 내용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쨌거나, 맥아더 회고록에도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 말을 들은 맥아더는 온 몸에 전율이 흘렀으며, 감동했다고 한다.


사실은...


[참고 자료]

1. 고모리 요이치, 송태욱 역, 『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서울: 뿌리와이파리, 2004.

2. 허버트 빅스, 오현숙 역, 『히로히토 평전』, 서울: 삼인, 2010.

3. 김현우, 『일본 현대정치사』, 서울: 아카넷, 2004.

4. 이시카와 마쓰미, 박정진 역, 『일본 전후 정치사』, 서울: 후마니타스, 2006.


  1. 원제는 侍従長の回想 [본문으로]
신고

'일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진훈의 역설  (0) 2017.01.02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2) 2016.08.18
전범은 우리가 직접 처벌한다  (0) 2016.08.14
대명강하  (0) 2016.08.13
군부대신 현역무관제  (0) 2016.08.12
가타야마 내각  (0) 2016.08.10

전범은 우리가 직접 처벌한다

일본 2016.08.14 18:47 by 소노라

1945년 9월 11일, 도조 히데키 등 A급 전범(평화에 반하는 죄) 혐의자 39명에 대한 체포 명령이 떨어졌다. 이튿날, 히가시쿠니 내각은 일본이 자체적으로 전범 재판을 실시한다는 각의를 내렸다. 히로히토는 이 결정에 대해 재고를 촉구했는데, 다음날 열린 각의에서도 같은 결정이 내려지자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9월 13일, 당시 외무 대신이자 훗날 총리가 되는 시게미츠 마모루가 이러한 의사를 연합군 측에 전달했지만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스스로 전범 재판을 진행했다.


일본은 1945년 9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B/C급(인도에 반하는 죄와 통상적 전쟁범죄 행위) 전범 8명에 대한 재판을 진행했다. 일본이 스스로 전범을 처벌하기를 원했던 것은, 일본에서 재판을 하고 나면 일사부재리원칙에 따라 연합군 측에서 처벌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이 재판은 연합군의 포고령에 의해 무효화되었다.

신고

'일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진훈의 역설  (0) 2017.01.02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2) 2016.08.18
전범은 우리가 직접 처벌한다  (0) 2016.08.14
대명강하  (0) 2016.08.13
군부대신 현역무관제  (0) 2016.08.12
가타야마 내각  (0) 2016.08.10

대명강하

일본 2016.08.13 17:09 by 소노라

내각책임제에서 내각의 각료는 국회 의원인 것이 보통이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일본의 경우 국무대신의 과반을 국회의원 중에서 임명해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반대로 일단 각료의 과반을 국회 의원 중에서 선임하고 나면, 나머지 국무대신들이 반드시 국회의원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각총리대신(총리, 수상)의 경우는 이야기가 달라서, 반드시 국회의원이어야 하는데 이는 일본국 헌법 제67조에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은 현행 평화헌법의 이야기이고, 메이지 헌법 체제에서는 총리가 반드시 국회의원일 필요가 없었다. 의원이 아니더라도 덴노(천황, 일왕)의 명령을 받아 총리가 되고, 내각을 조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대명강하라고 한다.


대명강하에 따라 마지막으로 총리가 된 것은 제1차 요시다 내각의 요시다 시게루였다.

신고

'일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2) 2016.08.18
전범은 우리가 직접 처벌한다  (0) 2016.08.14
대명강하  (0) 2016.08.13
군부대신 현역무관제  (0) 2016.08.12
가타야마 내각  (0) 2016.08.10
일본, 항복하다: 1945년 8월의 이야기  (0) 2015.12.28

군부대신 현역무관제

일본 2016.08.12 18:20 by 소노라

군부대신 현역무관제는 육군 대신과 해군 대신은 반드시 현역 대장이나 중장 가운데 임명해야 한다는 것으로 1900년 제2차 야마가타 내각때 제도화됐다.


육군은 이 제도를 악용해 내각을 붕괴시킨 적도 있었다. 1912년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이, 육군이 요구한 사단 증설안을 거부하자 우에하라 유사쿠 육군 대신이 사직해버렸던 것이다. 우에하라는 사직하면서 후임자를 추천하지 않았고, 육군 측에서도 후임자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사이온지 내각은 붕괴했다.


이듬해인 1913년 제1차 야마모토 내각은 이 제도를 개정한다. 군부대신이 반드시 현역일 필요는 없고, 예비역이나 후비역 대장 또는 중장이 임명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는 당시 총리였던 야마모토 곤노효에가 사쓰마 군벌의 실력자로 해군 대장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936년 5월, 히로타 내각은 군부대신 현역무관제를 부활시켰다.

신고

'일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범은 우리가 직접 처벌한다  (0) 2016.08.14
대명강하  (0) 2016.08.13
군부대신 현역무관제  (0) 2016.08.12
가타야마 내각  (0) 2016.08.10
일본, 항복하다: 1945년 8월의 이야기  (0) 2015.12.28
일본의 역대 최단명 내각,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  (0) 2015.12.27

가타야마 내각

일본 2016.08.10 19:01 by 소노라

카타야마 데츠는 처음으로 사회당 당수로 일본 총리가 된 인물이며,

처음으로 기독교도로 일본 총리가 된 인물이다.



1947년 4월 25일 치뤄진 제23회 중의원 총선거에서 카타야마 테츠(가타야마 데쓰)가 이끄는 사회당이 제1당이 됐다. 당시 사회당의 의석은 143석으로 총의석 466석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제2당은 요시다 시게루가 이끄는 자유당이었는데, 사회당과의 의석수 차이는 불과 12석이었고, 득표율은 오히려 자유당이 사회당보다 높았다. 제3당은 124석의 민주당이었고, 그 뒤를 31석의 국민협동당(국협당) 등이 따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즈음 사회당의 좌파와 우파는 연정 노선을 두고 갈등을 일으키는데, 그 핵심은 자유당을 연립 정권에 포함시킬 것인가의 여부였다. 어느 한 당도 과반 의석을 획득하지 못해 단독 정권 수립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민주당도 민주당과 자유당을 중심으로 한 연정을 구성하자는 쪽과 민주당과 사회당 중심의 연정을 구성하자는 쪽으로 분열된다.


5월 8일, 카타야마 테츠(사회당)와 요시다 시게루(자유당)간의 회동이 있었고, 이튿날에는 사회당·자유당·민주당·국민협동당간의 4당 회담이 있었다. 이들은 4당 연립정권을 구성한다는 큰 틀에 합의한다. 5월 12일에 열린 간사장 회담에서는 각료 배분을 사회당 5 자유당 5: 민주당 5: 국민협동당 1로 하기로 했다.


그러나 요시다 시게루는 사회당과의 연정을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사회당(좌파)과 공산당의 관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으며, 이는 단순히 사회당 좌파의 입각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당 당 차원에서 좌파를 일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당연히 다른 당에 내정 간섭을 하는 것이였고, 요시다 시게루의 자유당은 이를 구실 삼아 연정 교섭에서 벗어난다.



사회당하고 연정하기는 싫고, 무슨 핑계를 대지?

1년 4개월 후, 요시다 시게루는 총리에 복귀하고, 이어 6년 이상을 총리로 집권하게 된다.


이렇게 연정 구상에서 자유당이 이탈함에 따라, 사회당·민주당·국민협동당의 3당 연립 내각이 구성되게 된다. 각료 배분은 사회당 7: 민주당 7: 국민협동당 2로 이루어졌으며, 그밖에 참의원 녹풍회 소속 와다 히로오가 경제안정본부 총무장관과 물가청 장관에 임명된다. 참고로, 일본 정부조직에서 각 성의 수장은 대신이라 하며, 각 청의 수장을 장관이라 한다.


카타야마 내각의 성립은 1947년 5월 24일이지만, 실질적인 성립일은 6월 1일이다. 그 사이 외무대신, 내무대신, 대장대신, 사법대신, 문부대신, 후생대신, 농림대신, 상공대신, 운수대신, 체신대신과 물가청 장관 등의 직무는 카타야마 총리가 대리했다.


카타야마는 기독교도였는데, 당시 연합군 사령관이던 맥아더는 한국과 필리핀에 이어 일본 정치가 기독교에 의해 인도되도록 한 것을 자신의 업적이라고 자화자찬했다고 한다.


전시 일본의 식량 부족 현상은 심각했고, 전후에도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전후에도 식량 부족과 인플레이션은 계속됐다. 1946년 6월 2.7엔이던 쌀 1되의 공정 가격은 4년여가 지난 1950년 3월에는 62.3엔까지 올랐다. 암시장의 시세는 공정 가격보다 훨씬 높았는데, 1947년에는 공정 가격의 9배 수준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카타야마 내각은 신물가체계를 결정한다. 물가수준을 전전의 60~65배 수준으로, 근로자의 임금을 전전의 27~28배로 한다는 것이 골자였는데 사실상 근로자들에게 내핍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카타야마 내각은 크고 작은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탄광의 국가 관리를 두고 갈등이 있었다. 1947년 11월 4일, 카타야마는 신헌법에서 부여된 총리의 각료 파면권[각주:1]을 발동해 히라노 리키조우(平野力三) 농림대신을 파면했다.


사회당 좌파는 후임 농림대신에 노미조 마사루(野溝勝)를 추천했지만, 사회당 우파와 민주당, 국민협동당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사회당 좌파는 '당내 야당'을 선언했다. 사회당 좌파와 우파의 협력이 붕괴된 것이다. 민주당 역시 탄광 국가 관리 문제로 시데하라파 의원들이 탈당, 동지클럽을 결성해 분열된 상황이었다.


경제정책과 관련해서도 갈등이 있었다. 경제안정본부는 신물가체계를 통한 인플레이션 억제를 주장한 반면, 민주당과 대장성은 신물가체계 유지보다는 균형재정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억제할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카타야마 내각은 1948년 2월 10일 총사직한다. 기본적으로 연립 정권인데다 제1당인 사회당이 좌파와 우파로 분열되어 있어서 9개월 단명 정권으로 끝이 난 것이다. 후임 내각에는 역시 사회·민주·국민협동 3당을 연립 여당으로 하는 아시다 내각이 출범(3월 10일)한다.


지금의 후생노동성의 전신인 노동성이 창설된 것과 내무성이 해체된 것도 카타야마 내각때의 일이었다.


내무성은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지방자치·지방분권 개혁에 저항했는데,

특히 지사 공선제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1. 제68조 2항에서는 "내각총리대신은 임의로 국무대신을 파면할 수 있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본문으로]
신고

'일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명강하  (0) 2016.08.13
군부대신 현역무관제  (0) 2016.08.12
가타야마 내각  (0) 2016.08.10
일본, 항복하다: 1945년 8월의 이야기  (0) 2015.12.28
일본의 역대 최단명 내각,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  (0) 2015.12.27
연합군 최고사령부 GHQ(SCAP)  (0) 2015.11.14

1945년 7월 26일, 주요 3대 연합국(미국·영국·중국)의 명의로 포츠담 선언이 발표된다.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과 소련간의 중립조약이 유효했기 때문에, 소련을 통한 강화 협상(조건부 항복) 공작이 진행되고 있었다. 따라서 29일 오후 4시, 스즈키 간타로 수상은 이를 묵살한다는 '문제 발언'을 하게 된다. 일부에서는 이것이 번역의 문제였다고 이야기하고는 한다. 그러나 "포츠담 선언에는 별 가치가 없다, 전쟁 완수에 매진하겠다"는 문맥을 볼때 이것이 오역 문제가 아님은 분명해진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다. 이것이 원폭이라는 미국 측 발표에 의심을 갖던 일본 정부가 원폭임을 확인한 것은 8일이었다. 9일 오전 6시, 사코미즈 히사츠네 내각 서기관장에게 소련의 중립조약 파기 다시 말해, 소련의 대일전 참전 소식이 전달된다. 오전 10시 30분에 열린 최고전쟁지도회의가 30분 가량 진행됐을 무렵인 11시 2분에는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투하된다.

 

최고전쟁지도회의는 1944년 8월 4일 기존의 대본영정부연락회의를 대체해 새롭게 설치된 회의체였지만 연락회의와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대본영정부연락회의는 1937년 11월 처음 열렸는데 출석자는 정부에서는 내각총리대신(수상), 육군대신(육상), 해군대신(해상), 외무대신(외상)이, 대본영 측에서는 (육군)참모총장, (해군)군령부총장 등으로 내각과 통수부간의 의견을 조정하기 위해 개최된 것이다.

 

그러나 이 최고전쟁지도회의에서도 결론이 나지 않게 되자, 오후 11시 50분 히로히토가 참석한 가운데 어전 회의가 열리게 된다. 어전회의에는 추밀원 의장인 히라누마 기이치로, 내각 서기관장 사코미즈 히사츠네, 해군 군무국장 호시나 젠시로 등이 배석했다.

 

어전회의에서도 포츠담 선언의 수락을 둘러싸고 3대3의 팽팽한 대립 구도를 보이게 된다. 결국 10일 오전 2시, 스즈키 수상은 히로히토에게 성단을 요청하는데, 여기서 히로히토는 자신이 도고 외상과 생각이 같다고 말함으로써 포츠담 선언의 수락이라는 대방향이 정해지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히로히토의 1차 성단이다. 그렇다고 히로히토는 평화주의자였으며 군부에 끌려갔을 뿐이라는 식의 인식은 곤란하다.

 

정권 핵심에서 결단을 내려 달라는 요구가 나온 것은 이미 지난 2월이었다. 3차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으며 훗날 GHQ에 의해 전범 혐의자로 지목되자 자살하게 되는 고노에 후미마로가 패전은 이미 필지라는 상주문을 올린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히로히토는 더 큰 전과를 올린 후가 아니면 어렵다며 거절의 뜻을 밝혔고 그 결과로 수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아무런 의미 없이 스러져갔던 것이다.

 

10일 오전 7시, 중립국인 스위스와 스웨덴을 통해 포츠담 선언의 4대 연합국(미국·영국·중국·소련)에게 통보된다. 그 조건은 천황의 통치 대권에 수정을 가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였다.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번스 국무장관, 스팀슨 육군장관, 포레스탈 해군장관 등과 함께 회의를 열었고 일본에 대한 회신안 초안이 완성됐다. 이 초안은 다시 포츠담 선언의 다른 세 연합국 즉, 영국·중국·소련에게 전달된다. 소련은 전후 일본 점령에 대해 미국과 소련이 각각 최고사령관을 파견한다는 조건을 들었지만 이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렇게 전달된 연합국측의 회신은 다시 일본 정부에 분열을 가져오게 된다. subject to라는 부분이 문제가 된 것인데, 외무성은 군부를 의식해 이를 '(천황과 일본 정부의 통치권은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제한하에 둔다'로 번역했지만, 군부 측은 이를 '예속된다'로 번역하고 국체 유지가 불가능해지므로 1억 총옥쇄를 주장한 것이다. 이 13일의 회의에서도 다시 3대3으로 의견이 분열될 조짐을 보이자 14일 오전 11시, 다시 어전회의가 열린다. 여기서 히로히토는 최후의 선언을 내리게 된다. 바로 두 번째 성단이다.

 

2차 성단이 내려지자 종전 조서의 작성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몇 가지 수정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은 전세는 날로 불리해졌다는 부분이 전국은 호전되지 않았다로 수정된 것이다. 이 부분은 아나미 육군대신의 강력한 반발로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의 발표는 모두 거짓말이 되는 것이니, 우리는 전쟁에 패한 것이 아니라 전국이 호전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주장한 것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14일 오후 9시에는 라디오를 통해 내일 오전 중대 방송이 있을 것임이 알려진다. 그리고 밤 11시 20분부터 황궁에서 히로히토가 직접 녹음을 마쳤다. 두 장의 음반에는 5분 분량의 히로히토의 목소리가 담겨졌다. 이 음반들은 다음날 방송때까지 도쿠가와 의전비서가 보관했는데 일부 군부 인사가 이 음반을 탈취하려는 궁성 사건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15일 오전 7시 21분에는 전날 밤의 중대 방송이 히로히토의 직접 방송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정오에 히로히토의 목소리가 전파를 타게 된다. 사실 천황의 목소리가 전파를 타게 된 것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첫번째는 '사고에 의한 것'이었던만큼, 사실상 첫번째가 되는 셈이다. 당시 일반인들이 사용하지 않는 용어와 히로히토의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바로 이것을 알아들은 사람은 드물었고 이후 아나운서의 설명을 통해 일본의 패전 소식을 알게 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재밌는 점은 메이지 헌법 체제의 붕괴가 이 때를 포함해 2차 대전 시기에 매우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원래 포츠담 선언의 수락에 대한 결정은 추밀원의 자순사항에 상당하지만,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저 추밀원 의장이 어전회의에 참석하는 것으로 갈음했을 뿐이다. 진주만 공습 당시에도, 선전 포고에 대한 자순권을 갖고 있던 추밀원은 사후 추인 기관에 지나지 않았다. 내각 역시 최고전쟁지도회의에서 이루어진 결정을 형식적으로 추인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참고문헌]

小森陽一, 송태욱 역, 『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서울: 뿌리와이파리, 2004.
Stephen Walker, 권기대 역, 『카운트다운 히로시마』, 서울: 황금가지, 2005.
吉田 裕, 최혜주 역, 『아시아태평양전쟁』, 서울: 어문학사, 2012.
石川 眞澄, 박정진 역, 『일본 전후정치사』, 서울: 후마니타스, 2006.
半藤 一利, 이정현 역, 『일본의 가장 긴 하루』, 서울: 가람기획, 1996.

신고

일본 최후의 전시내각인 스즈키 간타로 내각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던 8월 14일,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는 내각을 맡으라는 소식을 전해 받는다.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는 황족 출신으로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의 아들이며 히로히토에게는 고모부가 된다.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는 육군대장으로 1941년부터 방위총사령관과 군사참의관을 지냈다. 이처럼 일제의 남자 '황족'은 군인 출신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는 1910년 황족신위령(皇族身位令)에 따라 육해군의 무관(장교)로 임관해야 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히가시쿠니는 전시에도 내각총리대신 하마평에 오른 적이 있었다. 1941년 10월, 제3차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이 사퇴하자 후임 총리 하마평에 오르기도 했지만 히로히토의 의지에 따라 도조 히데키 내각이 출범하게 된다. 어쨌든 8월 14일의 이 요청에 대해 히가시쿠니는 거부감을 보였지만 결국 받아들인다.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는 1947년 신적강하를 통해 황적에서 이탈하면서 히가시쿠니라는 성을 창설[각주:1]하게 된다. 즉, 1945년 8월 당시까지는 아직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가 왕(王)으로서 황족 신분에 있었으므로, 이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은 '황족 내각'이 되는 셈이다. 이 내각은 일본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황족 내각이었으며 또 최단명 내각(53일)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히가시쿠니 내각이 공식 출범한 건 8월 17일이었다. 우선 과제중 하나는 항복이 확정된 이상 항복문서에 누가 서명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당초 일부 연합국에서는 히로히토가 직접 서명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시게미츠 마모루 외무대신과 우메즈 요시지로 참모총장이 각각 일본 덴노/정부와 대본영을 대표해 "일본 개벽 이래 불명예인 문서에 이름을 써넣"[각주:2]게 되었다.


히가시쿠니 내각의 외상이었던 시게미츠가 전범 혐의자들을 일본 정부가 직접 재판하겠다는 뜻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에 전달했다가 거절 당한 후인 9월 18일, 히가시쿠니는 외국인 기자들에게 일본이 직접 전범을 처벌하겠다고 밝혔다. 9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일본은 실제로 전범혐의자 8명에 대한 재판을 진행했는데 이 재판은 GHQ에 의해 무효로 처리됐다.


10월 3일은 히가시쿠니 내각이 민주주의적 경향의 부활이라는 포츠담 선언의 목표를 실현하는데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야마자키 이와오 내무대신이 "반황실선전을 하는 자들은 체포한다, 천황제 폐지를 주장하는 자는 공산주의자로 간주하고 치안유지법에 따라 체포할 것이다"라고 발언했는가하면, 이와타 추조 사법대신도 국체의 변경에 대한 운동을 엄히 단속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사실 이 내각의 역사 인식은 8월 26일의 기자 회견과 9월 4일 88회 제국의회에서 행한 '종전에 이른 개요 보고'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바 있었다. 침략 전쟁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 데(패전) 대한 반성, '성단'을 통해 평화를 준 히로히토가 그 과정에서 얼마나 괴로워했을까에 대해 1억 신민이 반성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펼친 것이다.


결국 문제의 발언이 있었던 다음 날인 10월 4일 오후 6시, GHQ는 일본 정부에 인권지령을 내리게 된다. 인권지령은 사상·집회·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의 철폐, 정치범의 석방, 내무대신·경보국장·경시총감 등을 파면하고, 특별고등경찰(특고)를 폐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결국, 이 지령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히가시쿠니 내각은 5일 총사퇴했고, 10일 시데하라 내각이 출범하게 된다. 시데하라 내각의 출범은 10월 10일이므로 히가시쿠니 내각 대신들의 각료 신분은 법적으로는 9일까지 유지되었다.


1945년 8월 17일 출범한 히가시쿠니 내각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재임 기간 53일의 일본 역사상 최단명 내각이었다.


[참고문헌]

小森 陽一, 송태욱 역,『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서울: 뿌리와이파리, 2004.

구태훈, 『일본역사탐구』, 서울: 태학사, 2002.

俞天任, 박윤식 역,『대본영의 참모들』, 파주: 나남, 2014.

John W. Dower, 최은석 역, 『패배를 껴안고』, 서울: 민음사, 2009.


  1. 일본의 '황족'은 성이 없고, 대신 궁호를 사용하게 된다. [본문으로]
  2. 시게미츠 마모루의 자서전의 표현 [본문으로]
신고

연합군 최고사령부 GHQ(SCAP)

일본 2015.11.14 20:08 by 소노라

1945년 8월 30일, 연합군 최고사령관 겸 미 육군 태평양사령관 맥아더가 아츠기 비행장에 상륙했다. 이 날 미 육군 태평양사령부가 요코하마에 설치됐다. 이어 3일 후인 9월 2일 미주리호 함상에서 연합국과 일본의 항복 조인식이 열렸다. 10월 2일에는 도쿄 다이이치 생명관에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 본부가 설치됐는데, SCAP은 다이이치(제일) 생명 빌딩 외에도 여러 건물을 징발해 사용했다.


8월 13일, 포츠담 선언 수락 과정에서 일본국 덴노(天皇)와 정부는 연합군 최고사령관에 예속된다(subject to)[각주:1]는 연합국의 회신을 일본 정부가 받아들였다. 따라서 SCAP은 기존의 일본 정부와 관료 조직을 이용한 간접 통치 방식을 택하였음에도 양자의 관계는 상호 대등하지 않았다. SCAP은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기까지 6년여에 걸쳐 일본에서 정부 위의 정부로 군림했다. 


예를 들어 일본 내무성이 1945년 9월 27일 도쿄의 미국 대사관에서 있었던 맥아더와 히로히토의 첫 번째 회견 당시 촬영된 사진이 실린 신문을 불경하다며 판매 금지 처분하자 SCAP측에서 이를 취소한 적도 있었다.


한편, 1945년 10월 3일, 종전 처리를 위해 발족한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황족' 내각의 내무대신 야마자키 이와오가 치안유지법을 지속 적용할 뜻을 밝히자 다음 날 GHQ에서는 인권 지령을 내려 치안유지법 등 자유를 억압하는 법령의 폐지, 내무대신과 특별고등경찰 전원의 파면  10월 10일까지 정치범을 석방하도록 지시했다. 결국 10월 5일[각주:2] 히가시쿠니 내각은 총사직을 통해 붕괴됐다.


일본에서는 흔히 General Headquarters의 약자인 GHQ라고 부르는데 정식 영문 약칭은 SCAP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연합군 최고사령부와 미 육군 태평양사령부라는 두 개의 사령부가 존재했으며 이 두 사령부는 별개의 조직을 가졌다. 다만 일부는 두 사령부에서 겸직하는 사례도 있었다. 예를 들어 두 사령부 모두 사령관은 맥아더였으며, 참모장도 동일했다. 막료부에서는 SCAP 경제과학국장을 겸한 태평양육군 방공부장 마카트 소장과 같이 두 개의 사령부에서 부서장직을 겸하는 사례도 있었다.


SCAP의 조직은 시기마다 약간의 변동이 있었다예를 들어 1945년 12월 8일에는 도쿄 재판 준비를 위해 국제검사국(IPS)이 설치됐다. 다만, 사령관을 정점으로 참모장을 보좌하는 일반참모부(G1~G4)와 부참모장 예하의 특별참모부인 막료부(민정국·경제사회국·민간정보교육국 등)와 특정 문제를 다루는 임시위원회 조직 등이 존재했다.


기본적으로 SCAP의 통치는 기존의 일본 정부와 관료 조직을 활용한 간접 통치였다. SCAP의 공식 명령은 각서(SCAPIN, SCAP Index) 등의 형태를 취했지만 구두로 전달되는 경우도 많았다. 점령 후기 즈음에는 일본 측의 의사가 대부분 반영되었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영·중·소를 포함한 11개국으로 구성된 극동위원회의 설치가 결정됐다. 당초 소련은 극동위원회를 도쿄에 설치할 것을 주장했으나 워싱턴에 설치됐고, 대신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자문기관으로 미·영·중·소 4개국으로 구성된 대일이사회가 도쿄에 설치됐다. 대일이사회는 1946년 4월 5일부터 1952년 4월까지 164회가 열렸는데 1분 만에 폐회된 적도 자주 있었다. 


기본적으로 주요 연합4개국에 의한 분할점령이 이루어진 독일과 달리 일본은 사실상 미국에 의한 단독점령이 이루어졌다. 패전 직후 미국은 일본 분할 점령 방안을 검토해보기도 했으나 정식으로 채택되지는 못했다. 이 점에서 독일과 일본에 대한 점령 정책은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다.


점령 비용(종전 처리비)은 일본 정부의 몫이었는데 한 때 일본 전체 일반 예산의 3분의 1에 달했다.


[참고 자료]

1. 小森陽一, 송태욱 역, 『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서울: 뿌리와이파리, 2004.

2. John W. Dower, 최은석 역, 『패배를 껴안고』, 서울: 민음사, 2009.

3. 竹前栄治, 송병권 역, 『GHQ: 연합국 최고사령관 총사령부』, 서울: 평사리, 2011.

  1. 이 'subject to'의 번역에 대해서 외무성은 '제한된다'로 번역했고, 군부측은 '예속된다'로 번역하여 이렇게 되면 국체 유지(천황제 유지)는 불가능하다며 결사 항전을 주장하기도 했다. [본문으로]
  2. 후임 시데하라 내각이 10월 10일 성립되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10월 9일 해체 [본문으로]
신고
TAG GHQ, 일본

일본의 지방자치: 정령지정도시

일본 2015.10.28 18:50 by 소노라

메이지 시기 도입된 시제정촌제(1888)에서 시정촌에는 주민 직선의 의회 제도가 도입됐다. 물론 지금과 같이 1인 1표를 행사하는 평등선거는 아니었다. 시에서는 3등급 선거 제도, 정촌에서는 2등급 선거제도가 시행됐다. 직접 시세 납세총액을 3등분해서 각각 의원을 1/3씩 선출했다. 즉, 납세액에 따라 행사할 수 있는 표의 가치가 달랐던 것이다.


정촌장은 정촌의회에서 선거를 통해 선출했다. 이렇게 선출된 정촌장은 의장을 겸했다. 그런데, 시장의 선출은 이와는 조금 달랐다. 시의회에서 후보자 3명을 추천하면 내무대신이 그 중 1명을 임명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1888년 원로원에서는 3대 도시(도쿄시, 오사카시, 교토시)에 대해서는 시제 적용을 반대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도쿄의 15개 구에서는 호적, 징세, 징병 등 사무를 연간 300만 건 이상 처리하고 있는데 이를 한 시청에서 처리하는 것은 어려우니, 도쿄를 여러 개의 시로 나누어 각각 시장, 시참사회, 시의회 등을 두고 부지사(府지사)가 총괄한다는 구상이었다. 결국 3대 도시에 대해서는 특례 제도가 도입되었다. 3대 도시에는 시장을 두지 않고, 부(府)지사가 시장의 직을 대신했다. 이 제도는 3대 도시 측의 폐지 운동 끝에 1898년 폐지됐다. 물론 나머지 도시의 시장도 지금의 시장과는 위상이 다르다. 1911년 제도 개편이 이루어질 때까지 시의 집행기관은 시장이 아니라 시참사회였기 때문이다.


1919년 제정된 도로법에서는 국도와 부현도로를 부현지사가 관리토록 했다. 그런데 칙령으로 지정된 시에 대해서는 그 시의 행정구역 내의 국도와 부현도로를 시장이 직접 관리하도록 했다.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 앞서 본 3대 도시에 요코하마시, 나고야시, 고베시를 합친 6대 도시이다. 또, 이들 6대 도시는 다양한 사업을 펼치는데 일일이 지사의 감독을 받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내무성에 특별시제의 도입을 건의했다. 결국, 1922년에 6대 도시 행정 감독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시의 고유 사무와 칙령으로 인정된 국가 위임 사무에 대해서는 6대 도시 측이 부현지사의 감독을 받지 않고, 바로 중앙 내무성의 감독을 받게 된 것이다. 이보다 1년 앞선 1921년에는 시정촌의 의회 선거방법이 변경됐다. 구체적으로 정촌에서는 등급 선거 제도가 폐지됐고, 시는 3등급 선거에서 2등급 선거로 완화된 것이다.


1926년에는 시제가 개정되었다. 정촌과 마찬가지로 시장을 시의회에서 직접 선출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으며, 등급 선거제도가 폐지됐다. 1943년에는 도쿄도제가 시행됐다. 도쿄부와 도쿄시가 도쿄도로 통합된 것이다. 도쿄시의 흔적은 현재 도쿄의 23 특별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47년 지방자치법이 제정되면서 특별시 제도가 도입됐다. 그 이전까지 일본에서는 지방자치법은 두지 않고, 시제·정촌제·부현제·군제·도쿄도제 등 여러 법령들이 병립하고 있었다. 지방자치법에서는 인구 50만 이상의 대도시 가운데 주민 과반이 찬성한 경우에는 그 도시를 법률로서 특별시로 지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또, 특별시는 도도부현의 구여겡서 제외하며 도도부현에 관한 규정을 적용한다고 되어 있었다. 즉, 특별시가 되는 것은 도도부현에서 분리되어 도도부현과 동격의 광역자치단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와 관련해 5대 도시(도쿄시는 이미 폐지되었기 때문) 측과 부현의 갈등이 빚어졌다. 특별시 승격 주민투표의 선거권자에 대한 해석이 엇갈렸다. 대도시 측은 대도시 시민만이 대상이라고 보았고, 부현에서는 부현 주민 전체가 선거권자라고 보았다. 결국, 1956년 지방자치법을 개정해 특별시 제도를 폐지했다. 다만, 대도시 행정의 특수성은 인정되어 대신 정령지정도시 제도를 도입했다. 원래 정령지정도시는 이들 5대 도시에 대한 특례로 적용된 성격이 강했지만 1963년 키타큐슈시의 지정을 시작으로 현재 20개 도시가 지정되어 있다.


현재, 일본의 지방자치단체에는 각종 행정위원회가 집행기관으로 설치되어 있다. 이들은 법에 따라 반드시 설치되며, 시장과는 병립한다. 다만, 실질적으로는 시장이 이들 행정위원회보다 우위에 있다. 예컨대, 행정위원회는 의회에 예산안을 제출할 수 없으며 반드시 시장을 통해야만 한다. 그런데 행정위원회는 도도부현에 설치되는 것과 시정촌에 두어야 하는 것이 다르다. 정령지정도시는 시정촌에 속하지만, 도도부현에 가까운 예우를 받는다. 예를 들어, 도도부현에는 인사위원회를 두고, 시정촌에는 기본적으로 공평위원회를 두어야 하지만, 정령지정도시는 인사위원회를 두도록 되어 있는 것이 그것이다. 또, 정령지정도시의 교육위원 역시 도도부현과 같은 6명을 두도록 되어 있다. 특히, 시정촌 교육위원회는 교원에 대한 인사권을 갖지 못한다. 교원에 대한 인사권은 도도부현 교육위원회에서 가진다. 그런데, 정령지정도시 교육위원회는 시정촌 교육위원회이지만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다. 특이한 점은, 인사권은 정령지정도시 교육위원회에서 행사하지만, 교원에 대한 급여는 도도부현에서 지급한다는 점이다.

신고
TAG 일본
1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20)
항공송신소 (1)
비공개 (0)
일반 (0)
서평 (4)
일본 (10)
중국 (3)
국제정치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