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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송신소/중국지국

해서(하이루이)

소노라 2016. 8. 10. 18:53

해서(하이루이). 명나라 사람으로 고향은 해남도(하이난도). 자는 여현, 호는 강봉, 시호는 충개.


명나라의 과거 제도는 3단계였는데, 그 중 첫 단계인 향시에 합격하면 거인이라 불렸다. 거인은 회시와 전시에 응시할 수 있었고, 합격하면 진사가 됐다. 해서는 거인으로 관직을 시작했다.


1558년, 해서는 절강성(저장성) 순안현의 지현으로 부임했다. 당시 총독이던 호종헌의 아들은 자기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행패를 부렸고, 관원들을 모욕했다. 그러자 해서는 그가 가지고 있던 은자를 몰수하고, 총독부로 그를 호송시켰다. 그리고는 총독인 호종헌에게는 "각하께서 이런 자식을 둘 리가 없으니 이 사람이 각하의 아들이라는 것은 거짓이며, 이 사람은 가짜임에 틀림없습니다"라고 보고했다.


1560년, 좌부도어사 언무경이 지방 각 지를 순찰중에 있었다. 그는 사치스럽게 대접하지 말라고 발표했으나 이는 진심이 아니었다. 강직한 해서는 언무경에게 "각하께서 절강성까지 오시는 동안 가는 곳마다 술자리가 벌어졌고, 그때마다 은 3,4백냥을 소비했다고 들었습니다"라면서 허영과 착취를 그만둘 것을 요구했다.


1562년 해서는 강서성 흥국 지현으로 이동했는데, 그 해에 수석 내각대학사(수보) 엄숭이 실각했다. 이때, 호종헌과 언무경도 엄숭의 측근이었기 때문에 실각했다. 해서가 호종헌과 언무경이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 저항한 용기 있는 행동이 높은 평가를 받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다.


1565년 해서는 호부주사가 되었다. 그 해 11월, 해서는 가정제에게 치안소라는 상주문을 올린다. 치안소는 가정제의 잘못된 행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었고, 특히 가정제의 연호인 가정을 "사람들은 집집마다 남겨진 재산이 없이 깨끗하게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라면서, "세상 사람들이 폐하를 별 가치 없는 분으로 여긴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는 내외의 신하들이 모두 알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가정제는 몹시 분노하여 해서를 당장 체포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때 옆에 있던 황금이라는 환관이 "해서는 원래부터 기이한 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상주문을 올릴 때에는 죽음을 각오해 (자신의) 관을 사고,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했으며, 노비들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는 도망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명사 해서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1566년 2월 말, 가정제는 마침내 해서를 투옥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형부에서는 해서를 사형에 처하라고 했는데, 내각대학사 서계가 이를 막았다. 그렇게 10여개월이 지난 어느 날, 해서에게 술과 안주가 대접된다. 사형 집행 전 마지막 식사라고 생각한 해서는 이를 맛있게 먹었지만, 황제가 죽었다(붕어)는 소식을 듣게 되자, 몹시 슬퍼하며 먹은 음식을 모두 토해냈다. 가정제의 뒤를 이어 융경제가 즉위하자 해서는 석방되었다.


해서는 승진하여 정4품에 올랐다. 그러나 그에게는 권한과 책임 없는 자리가 주어졌다. 해서는 자신을 사직시켜 달라는 상주문을 올렸는데 진정한 의미는 자신을 권한과 책임이 따르는 자리로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그 요청은 받아들여졌고 해서는 남직예순무가 되었다.


해서의 남직예 부임이 발표되자 많은 지방관들이 보직 변경이나 퇴직을 신청했다고 한다. 남직예순무 해서는 부당한 방법으로 땅을 빼앗아 빈농의 원망을 많이 사던 한 가문에게 땅을 돌려주라고 했으며, 서척이라는 사람을 체포했다. 서척은 서계의 동생이다. 즉, 원망을 많이 샀던 그 가문은 바로 서계 일가였던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서계는 개인적으로 해서에게는 생명의 은인이었다.


해서가 남직예순무로 부임한 지 8개월여가 되었을 때 이부에서는 해서를 탄핵하는 상주문을 근거로 해서를 순무에서 해임하고 권한이 없는 한직으로 부임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분노한 해서는 1570년 봄에 사직했다.


해서가 다시 부름을 받은 건 15년이 지난 1585년의 일이었다. 그 해 2월, 해서는 남경도찰원 우첨도어사가 되었는데, 해남도에서 남경까지 부임하는 데 자비를 써서 부임했다. 1587년, 해서는 사망했는데, 임종 직전 자신에게 온 녹봉이 더 많이 지급되었다고 하여 돌려보냈다고 한다. 


해서는 청백리의 상징으로 포청천에 빗대어져 해청천이라고도 불린다. 정약용 역시 목민심서에서 해서를 청백리의 대표적인 인물의 하나로 소개하고 있다.


[참고 자료]

1. Ray Huang, 김한식 외 역, 『1587 만력 15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 서울: 새물결, 2004.

2. 이태준, "조선의 박수량(朴守良)과 명나라 해서(海瑞)의 반부패 행적 및 청렴성 비교 연구," 『아시아문화연구』 36, 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2014, pp.149-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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