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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1904~1905) 당시 일본의 전비는 17억 2121만엔이었다. 이는 1904년 일본 정부 세입 총액 3억 3천만 엔의 5배, 1903년 일본 정부 일반회계 약 2억 5천만엔의 7배를 웃도는 액수였다. 러일전쟁 10년전에 있었던 청일전쟁(1894~1895)에서 일본의 전비는 2억 3천만 엔이었는데, 청나라로부터 전쟁 배상금으로 3억 6천만 엔을 얻어낼 수 있었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 정부는 전비의 82.4%에 달하는 14억 7300만 엔을 공채를 통해 모집했는데, 그 가운데 8억 56만 엔이 외채였다. 또, 전시에 동원된 병사 109만 명의 과반인 55만 명이 농촌 출신이었다. 당시 농촌은 사람뿐만 아니라 소와 말도 징발되었기 때문에 노동력 부족이 심각한 상태였다. 또, 러일전쟁 당시 전시세 명목으로 추가된 비상특별세(非常特別税)도 폐지되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 국내에서는 러시아로부터 막대한 배상금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실제로 1905년 6월 30일, 일본 정부가 결정한 강화 조건 10개 항에서는 군비 배상 문제를 가능한 관철시켜야 할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었다. 이 조건에 따르면, 배상금은 최고 15억 엔에서 구체적 액수는 상황에 따라 결정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한 치의 땅도, 한 푼의 돈도 줄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일본은 승리하기는 했지만 전쟁을 지속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일본에 우호적이던 제3국들의 여론도 시간이 지나면서 러시아에 유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결국, 일본 정부는 배상금과 영토(사할린) 문제로 강화가 결렬된 위기에 처한 8월 28일, 배상금과 사할린 할양 문제를 모두 포기하더라도 강화를 성립시켜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다. 이 훈령을 받은 일본측 전권대사 코무라 주타로우(고무라 주타로)는 배상금을 완전히 포기하고 사할린을 양분하는 선에서 강화 회담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기대했던 배상금도 받지 못했고, 전비를 위해 모집한 채권은 모두 국민신민의 세금으로 상환해야 했으며, 전시 특별세도 폐지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의 국내 여론은 격앙되어 갔다. 신문들은 배상금을 받아내지 못한 정부를 비판했고, 강화 조약에 반대하는 히비야 폭동이 발생했다. 정부 고위 관료들의 저택과 파출소, 강화를 지지한 신문사 등이 습격을 받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계엄령이 선포됐다.


[참고 자료]

1. 구태훈, 『일본근세·근현대사』, 수원: 재팬리서치21, 2008.

2. 김후련, 『일본 신화와 천황제 이데올로기』, 서울: 책세상, 2012.

3. 스즈키 마사유키, 류교열 역, 『근대 일본의 천황제』. 서울: 이산, 1998.

4. 일본역사교육자협의회 엮음, 김현숙 역, 『천황제 50문 50답』, 서울: 혜안, 2001.

5. 정창석, 『만들어진 신의 나라』, 서울: 이학사, 2014.

6. 윤현명, "근대일본의 임시군사비에 대한 일고찰," 『한국학연구』28, 2012, pp.1-39.

7. 조명철, "포츠머스조약과 배상금 문제," 『일본역사연구』32, 2010, pp.157-186.


작성일: 2016년 9월 9일 13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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