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중앙독서국

마오쩌둥 평전①

소노라 2018. 2. 16. 22:21

(Alexander V. Pantsov & Steven I. Levine, Mao: The Real Story, New York: Simon & Schuster, 2012.) 심규호 역, 『마오쩌둥 평전』, 서울: 민음사, 2017.


상당한 자료 조사를 통해 마오쩌둥의 유년기부터 그가 '신중국'의 황제로 일생을 마치기까지 숨가쁘게 달려온 82년 생애를 관찰한 책이다. 최근 나오는 평전류의 책들이 그렇듯이 1044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본문만 800페이지에 육박한다. 젊은 시절 마오쩌둥과 훗날의 마오를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즉, 마적마(마오쩌둥의 적은 마오쩌둥)이라고나 할까.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오쩌둥이 매우 기뻐했다는 대목이나, 중국은 명목상으로는 공화정이지만 실제로는 과거 왕조 국가와 같은 전제정이나 다름 없다는 그의 발언을 볼 때에는 일말의 씁쓸함마저 느끼게 된다. 물론 이때에도 이미 과거로부터 내려온 일체의 미신을 타파해야 한다는 인식이 살짝 엿보이기도 하는데, 이게 훗날 문화대혁명의 복선이었을까?


중국의 4억 인민 가운데 약 3억 9000명이 미신을 믿고 있다. 귀신을 믿고 물상을 믿으며 강권을 믿는다. [……] 중국은 명목은 공화이지만 실제는 전제로, 마치 한 왕조가 다른 왕조로 대체되는 것처럼 악화 일로를 걷고 있을 따름이다. 이는 군중의 마음속에 민주의 그림자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민주가 과연 무엇의 결과인지 모르기 때문이다.[각주:1]


또, 무혈혁명을 주장하던 마오는 불과 몇 년 후 유혈혁명의 불가피함을 주장하는 입장이 된다.  


"우리는 강권자들 역시 사람,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만약 우리가 억압을 뒤엎기 위해 억압을 사용한다면……그 결과 우리는 여전히 억압 속에 있을 것이다."[각주:2]

혁명은 손님을 대접하는 일도 아니고 글을 쓰는 일도 아니며, 그림을 그리거나 자수를 놓는 것과 다르다. ……혁명은 폭동이며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전복시키는 폭력적인 행동이다. ……반드시 신사의 권력을 타도하고, 그들을 땅에 쓰러뜨리고, 심지어 발로 밟아야 한다. ……솔직히 말해 모든 농촌에서 당분간 공포 현상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각주:3]


그 밖에 이 책에서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젊은 시절의 마오쩌둥은 중국의 각 성마다 독립된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적도 있었다.


나는 '대중화민국(大中華民國)'에 반대한다. 나는 '후난 공화국'을 주장한다. ……무엇보다 좋은 방법은 전국적인 건설이 아니라 분열하여 각 성에 나누어 건설하는 것이다. '각 성(各省) 인민자결주의'를 실행하는 것이다. 22개의 행성(行省)과 세 개의 특구, 두 개의 번지(蕃地)로 나누어진 27개의 지방을 27개의 국가로 나누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각주:4]


그러나 젊은 마오쩌둥의 생각을 들여다 본 장면 중 가장 소름 끼치는 것은 바로 한고조 유방에 대한 그의 평가이다.


"유방은 역사상 최초로 평민에서 황제가 된 인물이야." 그는 계속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를 위대한 영웅으로 여겨야 한다고 생각해." [……] "하지만 만약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면 그의 정권도 안심할 수 없었을 거야. 아마도 황제로서 그렇게 오랫동안 지탱할 수 없었을 것이란 말이지." 마오쩌둥이 이렇게 말했다.[각주:5]


훗날 권좌에 오른 마오쩌둥은 반우파투쟁이나 문화대혁명 같은 대규모 숙청을 진행했다. 마오쩌둥이 실존 인물이 아니라, 영화나 소설 속 허구의 인물이었다면, 젊은 마오가 유방을 찬양한 이 대목은 너무 뻔한 복선이라고 생각할 정도다.  


저자가 러시아인이고, 구 소련의 비밀문서를 많이 참고해서 그런지 이 책을 읽다 보면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에는 늘 소련공산당과 스탈린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렇다면 스탈린의 소련 공산당이 중국 공산당에 그토록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던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소련이 가장 먼저 사회주의 국가가 된 스승이자 선배이기 때문인가? 저자는 보다 현실적인 이유를 지적한다. 바로, 중국공산당은 필요한 자금의 대부분을 소련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동안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코민테른의 원조 없이도 활동할 수 있다고 믿을 정도로 순진한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곧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1921년 코민테른은 중국공산당이 자체적으로 어렵게 1000위안을 모았을 때 1만 6650위안을 한 번에 제공했다. 1922년 중국공산당은 그해 말까지 모스크바로부터 1만 5000위안을 제공받았지만58 자체적으로 한 푼도 조달할 수 없었다.[각주:6]

여하간 이러한 식객 노릇으로 인해 중국공산당은 1930년대 중반까지 제 기능을 하기 위해 크렘린에서 달마다 제공하는 미화 3만 달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소련의 재정 지원은 정말로 모든 것을 아우를 정도였으며, [……] 소련의 재정 원조에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자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소련대사 미하일 보로딘에게 맞설 수 없었다.[각주:7]


한편, 마오쩌둥이 처음부터 중국공산당에서 독보적 지위를 누렸던 것은 아니다. 그 역시 몇 번의 권력 투쟁과 부침을 겪으면서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저자들은 그때마다 소련의 도움 내지 암묵적 방조가 큰 역할을 했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중국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이후로도 스탈린은 마오쩌둥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자신을 믿지 못하겠거든, 소련 사람을 보내 자신의 사상을 검증해보라고 제안했다. 스탈린은 진짜로 그렇게 했다.


스탈린의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소련 동지"들을 중국에 보내 자신의 저작물을 검토하고 편집해 볼 것을 요청했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이 자신이 신뢰하는 측근을 중국에 보내 직접 자신의 눈으로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얼마나 빈틈없이 마르크스주의를 따르고 있는지 확인해 줄 것을 진정으로 원했다. 스탈린은 정말로 마오쩌둥의 자격을 확인하려는 듯이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정통한 저명한 소련 학자 파벨 유딘을 1950년 봄 중국에 파견했다.[각주:8]


북한이 전쟁을 시작한 1950년 6월은 마오쩌둥이 천안문 성루 위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 수립을 선언한지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황은 반전됐고, 이후 북한군의 지리멸렬한 후퇴가 계속됐다. 북한은 강계에 임시정부를 차려야했고, 중국 동북부에 망명 정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이 즈음 중국공산당은 북한에 '중국인민지원군'을 파견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당시 중국 내부에서는 참전 반대 기류가 우세했지만 마오쩌둥이 파병 결정을 주도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마오쩌둥 역시 한국전쟁에 개입하고, 미국을 적으로 싸운다는 것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마오가 참전한 데에는 지정학적 이유가 컸다는 것이 중론이다. 여기에 더해 이 책의 저자들은 마오쩌둥이 스탈린의 '충실한 학생'이며 '진실한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마오쩌둥이 한국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한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크렘린의 두목에게 중화인민공화국 지도자가 헌신하고 있음을 보여 주려는 계산 같았다.[각주:9]


물론, 마오쩌둥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12년이 흐른 1962년에 이르러서 마오쩌둥은 이제는 고인이 된지 오래인 크렘린의 수령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1945년 당시 스탈린은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에 찬성하지 않았고, 내전을 벌이지 말고 반드시 장제스와 협력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 그 당시 우리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지만, 결국 우리의 혁명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각주:10]

중국 공산당이 승리한 이후, 스탈린은 중국이 유고슬라비아가 되어 내가 또 하나의 티토가 될까 두려워했습니다. […] 1950년 겨울, 우리나라가 항미원조 전쟁에 참가했을 때입니다. 스탈린은 그제야 비로소 우리가 유고슬라비아가 아니고 티토가 아니라고 믿었습니다.[각주:11]


문화대혁명 시절 마오쩌둥은 천보다에게 '너는 나와 류사오치에 관해서는 기회주의자'였다고, 자신의 부인 장칭에게는 '포부만 클 뿐 능력이 모자라고 타인을 무시한다'라고, 그리고 '친밀한 전우이자 후계자' 린뱌오 역시 질책하는 데 저우언라이에 대해서는 "유일한 예외는 총리뿐이야. 어떤 중요한 일이 진행될 때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도 항상 나에게 보고하고 있소."[각주:12]라면서 비교적 나쁘지 않은 평가를 해주고 있다. 물론 이건 저우언라이를 칭찬하기 위해 한 말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 위해 한 말에 가깝지만 말이다. 중국 개혁 개방의 총설계사로 수식되는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때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주자파로 몰려 숙청됐다. 문혁 직전 10년간 그는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당과 국가의 중요 업무를 지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훗날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이 자신을 죽은 시부모 모시듯 하며, 아무런 업무 보고도 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털어놓은 바 있다.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이 가장 극명하게 대조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그 저우언라이는 1927년말에 마오쩌둥을 기회주의자라며 불만을 토로한 바 있었다.


마오쩌둥의 부대는 토비들처럼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저우언라이는 이렇게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런 지도자(마오쩌둥)는 일반 군중의 역량을 믿지 않기 때문에 '군사적 기회주의'에 빠지기 쉽다."[각주:13]



최초 작성일: 2018.01.25. 23:59

1차 수정 및 공개일: 2018.02.16. 21:29

 

  1. (Alexander V. Pantsov & Steven I. Levine, Mao: The Real Story, New York: Simon & Schuster, 2012.) 심규호 역, 『마오쩌둥 평전』, 서울: 민음사, 2017, p.112. [본문으로]
  2. ibid., p.115. [본문으로]
  3. ibid., p.253. [본문으로]
  4. (橫山宏章, 『中國の異民族支配』, 東京: 集英社, 2009.) 이용빈 역, 『중화민족의 탄생: 중국의 이민족 지배논리』, 파주: 한울, 2012, pp.215-218을 참고. [본문으로]
  5. (Alexander V. Pantsov & Steven I. Levine, Mao: The Real Story, New York: Simon & Schuster, 2012.) 심규호 역, 『마오쩌둥 평전』, 서울: 민음사, 2017, p.71. [본문으로]
  6. ibid., p.174. [본문으로]
  7. ibid., pp.199-200. [본문으로]
  8. ibid., pp.531-532. [본문으로]
  9. ibid., pp.533-534. [본문으로]
  10. (Immanuel C.Y. Hsu, The Rise of Modern China,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조윤수·서정희 역, 『근-현대 중국사 하권: 인민의 탄생과 굴기』, 서울: 까치글방, 2013, p.822. [본문으로]
  11. ibid., p.823. [본문으로]
  12. ibid., p.748. [본문으로]
  13. ibid., p.298. [본문으로]

'중앙독서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방의 비극과 마오의 대기근  (0) 2018.03.02
마오쩌둥 평전②  (2) 2018.02.23
조선통치 비화  (0) 2018.02.09
등소평 문선  (0) 2018.02.02
모택동의 사생활  (2) 2018.01.26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알림
본 블로그는 해상도 1536×864와 엣지에서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Since 2008.09.15.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