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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독서국

시진핑 평전

소노라 2018. 3. 16. 21:29

(吳鳴, 『習近平傳』, 香港: 香港文化藝術出版社, 2008.) 송삼현 역, 『시진핑 평전』, 서울: 넥서스, 2010.


순수히 개인적 권력욕 때문이든 아니면 정적을 너무 많이 만들어 버린 바람에 호랑이 등에서 내려올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든, 시진핑이 우악스러운 방법으로 장기집권, 나아가 종신집권을 획책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렇지만 시진핑이 차기 지도자로 채택되고, 취임 초반만 하더라도 그에 대한 평가는 검소하며,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조용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 책이 그런 주장을 집대성한 책은 아니다. 그렇지만 읽고 나면 시진핑에 대해 꽤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라고나 할까.


재미있는 것은 시진핑과 보시라이를 은근히 대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부터 시진핑은 검소한 시중쉰의 가르침을 받아 청렴한 반면, 보시라이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보시라이가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공산당 당적마저 박탈되었지만 이 책의 원서가 2008년 나온 것이라는 걸 감안할 필요가 있다. 2008년이면 보시라이가 아직 중국의 4대 직할시 가운데 하나인 충칭시 서기로 있던 시절이다. 물론, 2007년 17차 당대회에서 시진핑과 리커창이 나란히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진입한 것과 달리 보시라이는 상무위원회 진입에 실패했고, 따라서 그가 '5세대 지도부의 핵심'이 될 수 없는 것은 그 당시에도 분명했다. 또, 보시라이가 충칭 서기로 발령된 것을 보아 그가 지방 제후 정도에서 정치 인생을 마무리하게 될 것이라거나 잘해야 차차기에서 1차례 상무위원직을 지내는데 그칠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보시라이가 충칭에서 창홍타흑 모델을 개발해 대대적으로 선전한 것도 그런 상황을 '한판 뒤짚기' 하기 위해 나온 것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래도 2008년 당시까지만 해도 보시라이는 공식적으로 부총리급인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고위직 정계 거물급 인사였다.


보이보, 왕전,천이, 허룽 등의 가족들이 한 사치에 비하면 중난하이에서 시중쉰의 가족은 근검절약하는 편이었다. [……] 예를 들면 보씨(薄氏) 집안의 아이들은 모두 손목시계, 수입 자전거, 반도체 라디오를 가지고 있었고, 모두 자기 혼자 사용하는 공부방, 침실 및 화장실을 가지고 있었다.[각주:1]


시중쉰은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인화단결(人和團結)을 중시하고 인화단결을 잘하는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였으며, [……] 그것은 그에게 모든 일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인간 관계를 잘해야 하며, 다른 사람들과 인화단결을 잘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 이와 반대로 보시라이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고, 인화력이 부족하여 부하들에게 걸핏하면 화를 내고, 상사와는 공명을 다투었다. [각주:2]


저자는 시진핑의 인터뷰를 인용하면서, 그가 진시황제나 한무제보다 인화단결에 장점이 있는 유방, 유수, 유비를 더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오늘날 시진핑이 '시 황제'로 비견된다는 점을 보면 정말 재미있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좋아하는 역사적인 인물은 결코 진시황(秦始皇)이나 한무제(漢武帝), 당태종(唐太宗)이나 송태조(宋太祖) 또는 일대 천교(天驕)인 칭기즈칸(成吉思汗)이 아니고, 유방(劉邦), 유수(劉秀), 유비(劉備), 송강(宋江) 같이 그 스스로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지략은 없으나 인화단결을 잘하는 데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각주:3]


시진핑의 가장 큰 장점은 그가 청렴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시진핑의 측근들 역시 부패하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그가 여기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이 책이 쓰여진 당시만 해도 시진핑은 공산당에서 보기 드물게 깨끗한 사람이라는 것이 일반적 평이었다.


시진핑은 관리가 된 후 줄곧 대단히 청렴하였다. 그는 일찍이 이렇게 말하였다. "곰발바닥과 생선은 함께 얻을 수 없듯이 정치에 종사하려면 돈을 벌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 정치에 종사하면서도 돈을 벌려고 생각한다면 사람들이 뒤에서 손가락질하는 탐관오리가 될 수밖에 없어 명성에 먹칠을 할 뿐만 아니라 놀라서 떨며 항상 잡혀갈까 두렵고 말로가 좋지 않다.[각주:4]


한편, 시진핑이 막강한 권력을 얻는 데 성공한 데에는 여러 배경과 사건이 작용했다. 첫째는 시진핑이 혁명 원로인 시중쉰의 아들이라는 점이다. 둘째는 그가 군 경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지방에서 일하면서 군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세번째로 비록 덩샤오핑이나 천윈, 리셴녠 같은 2세대 지도부의 거물급 인사들은 이미 진작에 자연 수명을 다했으나, 이후에도 생존해 있던 완리 전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위원장이나 덩리췬 전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장 같은 2세대 혁명원로들이 시진핑 집권기에 사망했다는 점이다. 또, 가장 중요한 것은 반부패 사정작업의 칼날을 쥔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에 그의 측근인 왕치산이 기용되었다는 점이다. 시진핑은 이런 배경 속에서 반부패 숙청 작업을 통해 정적을 제거하고 1인 권력을 강화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시진핑은 이미 지방에서 일할 때 이 반부패 작업의 원형을 보인 바 있다. 덧붙여 말하자면 반부패 작업이 시진핑의 독창적인 창조물은 아니다. 일찍이 마오쩌둥은 부패, 낭비, 관료주의에 반대하는 삼반운동을 발동한 바 있었다. 물론 삼반운동의 감춰진 목적은 국민당 간부 출신을 타도하는 것이었다.


6·4사건 이후 중국 전체의 정치·경제적 분위기는 어두침침하였다. 시진핑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치적을 이룬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을 간파하고 반부패를 돌파구로 삼아 위엄과 신망을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 시진핑은 '길가에 널려 있는 부패'를 제거하되 공감대를 형성한 후 기한을 정하여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신이 그렇게 하면 현지의 당원과 간부들로부터 미움만 사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에 시진핑은 진노하여 말하였다. "몇 백 명의 미움을 사는 것이 낫습니까 아니면 몇 백만 명의 미움을 사는 것이 낫습니까? 소수를 두려워해야 합니까 아니면 다수를 두려워해야 합니까? 법률제도를 위해서 일해야 합니까 아니면 관직을 위해 일해야 합니까?"[각주:5]

물론, 반부패 자체가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니며 오히려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반부패 작업의 칼날은 어느 한쪽에게만 통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중국 현대사에서 반부패 작업이 순수한 반부패를 목적으로 한 적은 없었고, 오히려 진정한 목적은 정적을 제거하는 데 있었다.

또, 지금 개인 우상화에 열중인 시진핑을 보면 잘 상상이 가지 않지만, 권좌에 오르 전까지 시진핑은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공이 있다면 집단에 돌리고, 자기 홍보에 열중하지도 않았다.


어떤 기자가 일찍이 그에게 "푸젠에 있었던 17년 동안 당신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업적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다. 시진핑은 "왕씨 할머니가 오이를 파는 격으로, 어떤 것이 내게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이라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업적은 집단이 창조한 것으로 어떤 것이 개인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각주:6]


그렇다고 이 책이 시진핑 찬양 일변도인 것은 아니다.


시진핑은 정말로 닝더에서 '좋은 간부를 양성'하였을까? 훗날의 사실이 보여주는 것은 거의 그렇지 않았다.[각주:7]



[……] 닝더 집단부패 사건이 터졌을 때 시진핑은 이미 저장성에서 성위원회 서기를 지내고 있었다. 징푸성과 저우진훠가 시진핑의 측근이었다는 증거는 없으나 그가 닝더에서 '좋은 간부집단을 양성'한다고 말한 것은 실제보다 말이 더 앞섰던 것이었음이 분명하다.[각주:8]


공평하게 말해서 6년간 푸저우의 정무를 주관하였던 시진핑의 치적은 화려하게 표현하기 어렵다. 그가 정책결정에 참여한 2가지 큰 사업 즉, 창러국제공항(長樂國際機場)의 건설과 리자청(李嘉誠)을 끌어들여 행한 구도시(舊都市) '삼방칠항(三坊七巷)'의 개조에 대하여는 오히려 악평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전자는 설계가 지나치게 전례를 초과하고 장소 선택이 좋지 않아 수십억 위안의 손해를 보는 바람에 거의 도산할 지경에 이르렀고, 후자는 민의가 들끓어 올라 부득불 정지를 명할 수 밖에 없었다.



비록 그는 결코 이 2가지 대형 사업의 주요 결정자가 아니었지만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다. 동시에 그가 간부를 발탁하는 면에 있어 많은 논쟁이 있었다.[각주:9]



2002년, 당시 푸젠성장을 지내던 시진핑은 칭화대학교 인문사회학원 마르크스 이론 및 사상 정치교육 전공의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 학위는 그의 '공농병 청강생' 이미지를 씻는 데 도움이 되었으나 많은 논쟁을 일으켰다.



박사 학위 과정의 전공은 반드시 전심전력으로 몰두해야만 하고, 여러 해의 시간을 쏟아야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시진핑은 지방제후(地方諸侯)를 맡아 매일 온갖 정사를 처리해야 했을 텐데 논문을 쓸 시간이 어디 있었겠는가? 베이징은 또 푸저우로부터 10만 8,000리(里)나 떨어져 있는데 그가 어떻게 그 먼 곳에서 학문을 탐구하고 교수의 지도를 받을 수 있었겠는가?[각주: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 내용을 보면 시진핑에 대해 우호적인 듯한 인상을 준다. 그 외에 흥미로웠던 부분은 다음과 같다.


중국공산당의 관리사회에서 이러한 현상은 매우 많다. 사업 결정의 잘못은 그들의 승진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각주:11]


중국공산당이 일당독재를 정당화하는 논리 중 하나가 바로 낙하산식으로 갑자기 국가 최고위직에 취임하게 되는 서구식 민주주의 국가들과 달리, 중국은 지방부터 시작하여 능력이 있는 자만이 승진한다는 것이다. 정말 과연 그럴까?



  1. (吳鳴, 『習近平傳』, 香港: 香港文化藝術出版社, 2008.) 송삼현 역, 『시진핑 평전』, 서울: 넥서스, 2010, p.33. [본문으로]
  2. ibid., p.34. [본문으로]
  3. idid., pp.238-239. [본문으로]
  4. idid., pp.255-256. [본문으로]
  5. ibid., pp.192-193. [본문으로]
  6. ibid., p.261. [본문으로]
  7. ibid., p.197. [본문으로]
  8. ibid., p.200. [본문으로]
  9. ibid., p.214. [본문으로]
  10. ibid., p.100. [본문으로]
  11. ibid., p.22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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