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서(하이루이). 명나라 사람으로 고향은 해남도(하이난도). 자는 여현, 호는 강봉, 시호는 충개. 명나라의 과거 제도는 3단계였는데, 그 중 첫 단계인 향시에 합격하면 거인이라 불렸다. 거인은 회시와 전시에 응시할 수 있었고, 합격하면 진사가 됐다. 해서는 거인으로 관직을 시작했다. 1558년, 해서는 절강성(저장성) 순안현의 지현으로 부임했다. 당시 총독이던 호종헌의 아들은 자기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행패를 부렸고, 관원들을 모욕했다. 그러자 해서는 그가 가지고 있던 은자를 몰수하고, 총독부로 그를 호송시켰다. 그리고는 총독인 호종헌에게는 "각하께서 이런 자식을 둘 리가 없으니 이 사람이 각하의 아들이라는 것은 거짓이며, 이 사람은 가짜임에 틀림없습니다"라고 보고했다. 1560년, 좌부도어사 언무경이..
1970년 8월 23일, 루산에서 중국 공산당 제9기 중앙위원회 제2차 전체회의(9기 2중전회)가 열렸다. 린뱌오와 천보다는 폐지하기로 되어 있던 국가주석직을 유지해야 하며, 마오쩌둥이 국가주석에 재취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오는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1949년부터 류사오치에게 국가주석직을 물려준 1959년 4월까지 국가주석이었다. 마오의 뒤를 이어 국가주석이 된 류사오치는 말년에 문화대혁명을 겪으면서 예기치 않은 순교자가 됐고, 이후 국가주석직은 공석 상태였다. 그런데 린뱌오와 천보다의 국가주석직을 부활시키자는 주장은 마오의 방침과 충돌하는 것이었다. 마오는 그 해 초, 국가주석직을 폐지할 것을 주장한 바 있었다. 또 린과 천은, 마오를 천재로 찬양하는 문구를 헌법에 추가하자고 제안했다. 여기에 더..
1982년 11월, 20년 가까이 소련을 통치하던 브레즈네프가 사망했다. 그 뒤를 이은건 유리 안드로포프였다. 안드로포프는 1984년 2월 사망했다. 1년 3개월 남짓의 짤막한 재임 기간이었다. 안드로포프가 죽자 바통을 이어받은 건 콘스탄틴 체르넨코였다. 그는 취임 이듬해인 1985년 3월 사망했다. 역시 1년 1개월 남짓의 짤막한 재임 기간이었다. 체르넨코의 후임은 그 유명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다. 이처럼 브레즈네프의 사망부터 미하일 고르바초프 집권까지 소련은 거의 매년 최고 지도자의 장례를 치뤄야 했다. 그야말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다스렸던 것이다. 이 고르바초프의 회고록 『선택』에는 한 가지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소련 정치인 중에 안드레이 키릴렌코 라는 사람이 있었다. 농구선수와는 동명이인. 그런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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