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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송신소/일본지국

가타야마 내각

소노라 2016. 8. 10. 19:01

카타야마 데츠는 처음으로 사회당 당수로 일본 총리가 된 인물이며,

처음으로 기독교도로 일본 총리가 된 인물이다.



1947년 4월 25일 치뤄진 제23회 중의원 총선거에서 카타야마 테츠(가타야마 데쓰)가 이끄는 사회당이 제1당이 됐다. 당시 사회당의 의석은 143석으로 총의석 466석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제2당은 요시다 시게루가 이끄는 자유당이었는데, 사회당과의 의석수 차이는 불과 12석이었고, 득표율은 오히려 자유당이 사회당보다 높았다. 제3당은 124석의 민주당이었고, 그 뒤를 31석의 국민협동당(국협당) 등이 따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즈음 사회당의 좌파와 우파는 연정 노선을 두고 갈등을 일으키는데, 그 핵심은 자유당을 연립 정권에 포함시킬 것인가의 여부였다. 어느 한 당도 과반 의석을 획득하지 못해 단독 정권 수립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민주당도 민주당과 자유당을 중심으로 한 연정을 구성하자는 쪽과 민주당과 사회당 중심의 연정을 구성하자는 쪽으로 분열된다.


5월 8일, 카타야마 테츠(사회당)와 요시다 시게루(자유당)간의 회동이 있었고, 이튿날에는 사회당·자유당·민주당·국민협동당간의 4당 회담이 있었다. 이들은 4당 연립정권을 구성한다는 큰 틀에 합의한다. 5월 12일에 열린 간사장 회담에서는 각료 배분을 사회당 5 자유당 5: 민주당 5: 국민협동당 1로 하기로 했다.


그러나 요시다 시게루는 사회당과의 연정을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사회당(좌파)과 공산당의 관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으며, 이는 단순히 사회당 좌파의 입각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당 당 차원에서 좌파를 일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당연히 다른 당에 내정 간섭을 하는 것이였고, 요시다 시게루의 자유당은 이를 구실 삼아 연정 교섭에서 벗어난다.



사회당하고 연정하기는 싫고, 무슨 핑계를 대지?

1년 4개월 후, 요시다 시게루는 총리에 복귀하고, 이어 6년 이상을 총리로 집권하게 된다.


이렇게 연정 구상에서 자유당이 이탈함에 따라, 사회당·민주당·국민협동당의 3당 연립 내각이 구성되게 된다. 각료 배분은 사회당 7: 민주당 7: 국민협동당 2로 이루어졌으며, 그밖에 참의원 녹풍회 소속 와다 히로오가 경제안정본부 총무장관과 물가청 장관에 임명된다. 참고로, 일본 정부조직에서 각 성의 수장은 대신이라 하며, 각 청의 수장을 장관이라 한다.


카타야마 내각의 성립은 1947년 5월 24일이지만, 실질적인 성립일은 6월 1일이다. 그 사이 외무대신, 내무대신, 대장대신, 사법대신, 문부대신, 후생대신, 농림대신, 상공대신, 운수대신, 체신대신과 물가청 장관 등의 직무는 카타야마 총리가 대리했다.


카타야마는 기독교도였는데, 당시 연합군 사령관이던 맥아더는 한국과 필리핀에 이어 일본 정치가 기독교에 의해 인도되도록 한 것을 자신의 업적이라고 자화자찬했다고 한다.


전시 일본의 식량 부족 현상은 심각했고, 전후에도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전후에도 식량 부족과 인플레이션은 계속됐다. 1946년 6월 2.7엔이던 쌀 1되의 공정 가격은 4년여가 지난 1950년 3월에는 62.3엔까지 올랐다. 암시장의 시세는 공정 가격보다 훨씬 높았는데, 1947년에는 공정 가격의 9배 수준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카타야마 내각은 신물가체계를 결정한다. 물가수준을 전전의 60~65배 수준으로, 근로자의 임금을 전전의 27~28배로 한다는 것이 골자였는데 사실상 근로자들에게 내핍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카타야마 내각은 크고 작은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탄광의 국가 관리를 두고 갈등이 있었다. 1947년 11월 4일, 카타야마는 신헌법에서 부여된 총리의 각료 파면권[각주:1]을 발동해 히라노 리키조우(平野力三) 농림대신을 파면했다.


사회당 좌파는 후임 농림대신에 노미조 마사루(野溝勝)를 추천했지만, 사회당 우파와 민주당, 국민협동당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사회당 좌파는 '당내 야당'을 선언했다. 사회당 좌파와 우파의 협력이 붕괴된 것이다. 민주당 역시 탄광 국가 관리 문제로 시데하라파 의원들이 탈당, 동지클럽을 결성해 분열된 상황이었다.


경제정책과 관련해서도 갈등이 있었다. 경제안정본부는 신물가체계를 통한 인플레이션 억제를 주장한 반면, 민주당과 대장성은 신물가체계 유지보다는 균형재정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억제할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카타야마 내각은 1948년 2월 10일 총사직한다. 기본적으로 연립 정권인데다 제1당인 사회당이 좌파와 우파로 분열되어 있어서 9개월 단명 정권으로 끝이 난 것이다. 후임 내각에는 역시 사회·민주·국민협동 3당을 연립 여당으로 하는 아시다 내각이 출범(3월 10일)한다.


지금의 후생노동성의 전신인 노동성이 창설된 것과 내무성이 해체된 것도 카타야마 내각때의 일이었다.


내무성은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지방자치·지방분권 개혁에 저항했는데,

특히 지사 공선제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1. 제68조 2항에서는 "내각총리대신은 임의로 국무대신을 파면할 수 있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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