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중앙독서국

등소평 문선

소노라 2018. 2. 2. 21:29

(邓小平, 中国共产党中央文献编辑委员会 編, 『邓小平文选』, 第三卷, 北京: 人民出版社, 1993.) 김승일 역, 『등소평 문선』, 서울: 범우사, 1994.


이 책은 1993년 중국공산당 중앙문헌편집위원회에서 엮고 인민출판사에서 출간한 덩샤오핑(등소평) 문선 제3집을 번역한 것으로, 상권과 하권으로 나뉘어져 있다.


어느 나라나 최고 실력자의 말은 권력이나 권위를 가지지만, 특히 중국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최고 실력자의 말은 곧 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후진타오 정도를 제외하면 중국의 역대 최고 실력자들은 막강한 권력을 누려왔다. 그렇다면 덩샤오핑은 어땠을까? 덩샤오핑 역시 그러했다. 그는 중국공산당이 중국 본토를 장악한 이후 약간의 부침을 겪기도 했지만, 오랜 세월 최고지도부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생의 마지막 이십여년은 명실공히 중국의 최고 실력자였다. 다만, 그의 권력은 마오와는 달랐다. 마오는 실질적으로나 명목적으로나 중국(공산당)의 최고 지도자였으나, 덩샤오핑은 적어도 명목적으로는 중국공산당의 최고 지도자였던 적이 없었다. 또, 그의 실질적인 권력도 결코 마오와 같지 않았다. 천윈(진운) 같은 다른 원로파들을 배려해야 했던 것이다.


덩샤오핑과 천윈의 의견이 가장 갈렸던 것은 바로 경제정책이었다. 덩샤오핑이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그만!(흑묘백묘론)'이라며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적 요소를 도입하려고 한 것은(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유명한 이야기다. 1992년 미국 대선 당시 빌 클린턴이 들고 나온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economy, stupid!)'는 정치와 경제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덩샤오핑도 이 점을 잘 지적한 바 있었다.


인민들이 지금 무엇 때문에 우리를 옹호합니까? 바로 10년 동안 발전이 있었고 그 발전이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5년 동안 발전하지 못했거나 혹은 저속으로 발전했다면, 예를 들어 4%, 5% 심지어 2%, 3%였다면 어떤 영향이 생겼겠습니까? 이것은 단지 경제문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는 정치문제인 것입니다.[각주:1]

경제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자본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개발도상국에서는 경제 성장을 위한 자본 자체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결국 남의 돈을 빌려야 하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중국에서는 외채 도입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도 마오쩌둥 시대를 마감할 무렵 중국은 개발도상국 중 외채를 지지 않고 있던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였다. 외채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은 북한 김일성의 발언에서 잘 나타나는데, 당시 중국 '보수 좌파' 지도부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외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외자를 받아들여 경제를 건설하면, 예속경제가 되고 맙니다. 나라의 정치 독립뿐만 아니라, 경제 독립도 중요합니다. 경제적으로 다른 나라에 예속되면, 정치적으로 예속됩니다. 우리는 경제건설에서 외자를 받아들여 단번에 높이 뛰어오르려 하지 않으며, 자체의 힘으로 한단계 한단계씩 착실히 톱아(높이) 오르려고 합니다.[각주:2]

덩샤오핑은 외채를 너무 많이 빌리면 안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채 자체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떤 나라들은 외채를 많이 차용해다 경제발전에 이용해 성공하고 있습니다. […] 우리는 두 가지 경험을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첫째는 그들이 감히 외채를 빌릴 수 있었다는 정신을 배워야 하고, 둘째는 외채를 적당히 빌려야지 너무 많이 빌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방면의 경험에 주의해야 합니다. 외채를 빌린다는 것이 무서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생산발전에 대부분을 써야지 재정적자 해결에 쓰면 안 됩니다.[각주:3]

특히, 덩은 가난은 사회주의가 아니며, 경제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이 사회주의라고 보았다. 경제에 도움이 된다면 자본주의나 시장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가난은 사회주의가 아닙니다. 우리가 사회주의를 견지하고 자본주의보다 우월한 사회주의를 건설하자면 무엇보다 먼저 가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각주:4]

그는 시장이 곧 자본주의고, 계획이 곧 사회주의는 절대 아니라면서, 사회주의에도 시장이 있을 수 있고, 자본주의에도 계획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계획이 더 많으냐 시장이 더 많으냐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구분이 아닙니다. 계획경제가 곧 사회주의인 것이 아닙니다. 자본주의도 계획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장경제가 곧 자본주의인 것도 아닙니다. 사회주의도 시장이 있습니다.[각주:5]


이 점은 성이 자씨냐, 사씨냐 일화에서 잘 나타난다.


 "덩샤오핑 동지는 잠시 생각한 후에 의미심장하게 기계를 가리키며 우리들에게 물었다. '이 설비의 성은 사인가, 자인가?'라고. 우리들이 멍하니 있자, 덩샤오핑 동지는 계속하여 말했다. 이 설비의 원래 성은 '자'였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국가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지금 이것의 성은 '사'이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를 위해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는 '사'로 전화轉化되기도 하고, '사'도 '자'로 전환될 수 있다."[각주:6]

덩샤오핑의 공적 중 하나가 개혁개방에 힘을 실어주었다는 점이라면, 다른 하나는 바로 종신제를 철폐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제1세대 지도부의 핵심이었던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도 현직 당 주석과 총리였다. 소련도 그랬다. 덩샤오핑은 종신제의 폐해를 잘 알고 있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덩샤오핑은 당시의 원로 정치인들로는 개혁개방을 제대로 이끌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원로 정치인들을 퇴진시키기 위한 과도기적 조치로 고문위원회를 설치하고, 자신이 초대 중앙고문위원회 주임(위원장격)에 취임했다.


중앙고문위원회는[…] 중앙위원회를 더욱 젊어지게 하고 연로한 동지들이 제1선에서 물러난 후에도 계속하여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 중앙고문위원회는 중앙위원회에 대한 정치적인 조수와 참모의 기능을 할 것이라고 당장은 규정하였습니다. 중앙고문위원회 위원은 중앙전체회의에 옵서버로 참가할 수 있고, 고문위원회 부주임은 정치국회의에 옵서버로 참가할 수 있으며, 필요시에는 고문위원회 상무위원도 정치국회의에 옵서버로 참가할 수 있습니다. 또한 중앙고문위원회 부주임과 상무위원의 직위는 중앙정치국 위원에 해당합니다.[각주:7]

그런데 중앙고문위원회의 '원로'들은 중앙위원회나 중앙정치국 같은 '현직 지도자'들의 선임이며, 여러 경력으로 보아도 현직은 그들과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따라서 공식적으로는 중앙고문위원회가 중앙위원회가 '조수와 참모'일지는 몰라도, 실질적으로는 중앙위원회가 중앙고문위원회의 '조수'가 될 위험이 존재한다. 옥상옥 구조가 될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덩샤오핑은 중앙고문위원회가 한시 조직이며 10년에서 15년 후에는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도 중앙고문위원회가 성립되고 이루어진 첫 번째 회의에서 말이다.


10년 후나 길어도 15년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에서 이 고문위원회를 취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10년 동안에 2기는 필요할 것입니다. 1기는 좋을 것 같지 않습니다. 너무 촉박한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고문위원회가 오늘 방금 성립되었는데 머지 않아 취소할 것이라고 선포하니 이 조직이 과도적인 성질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각주:8]


덩샤오핑의 최고 공적이 개혁개방과 종신제 철폐라면, 그의 가장 큰 과오는 죄 없는 많은 사람들을 탄압한 것이다. 1950년대 반우파 투쟁을 진두지휘한 것도 그렇지만, 역시 1989년의 천안문 사태가 대표적이다. 덩샤오핑은 천안문 사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자유롭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그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리펑의 뒤에 덩샤오핑 같은 원로방이 있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당연하지만 덩샤오핑은 천안문 사태가 반동 세력들의 반혁명 폭란이었다고 규정하며, 시위 진압은 불가피했다고 주장했다.


사건이 폭발하자 사태는 아주 명백했습니다. 그들의 근본 슬로건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공산당을 타도하자는 것이고, 하나는 사회주의 제도를 뒤엎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완전히 서방에 예속되는 자산계급공화국을 건립하려는 것이었습니다. […] 핵심은 공산당을 타도하고 사회주의 제도를 뒤엎는다는 데 있습니다.[각주:9]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덩샤오핑이 4개현대화를 추구하면서도, 그 중 하나인 국방현대화는 의도적으로 무시했다는 점이다. 사실, 무시했다기 보다는 당장 국방현대화를 추구할 단계가 아니고, 국방현대화는 경제성장을 이룩한 후에 진행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1980년대 중국의 국방예산 증가율은 경제성장률이나 물가상승률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실질 국방예산은 감소하고 있었다. 

네 가지 현대화에는 국방 현대화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국방 현대화를 하지 않으면 세 가지 현대화로만 그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네 가지 현대화에도 선후가 있습니다.[…] 먼저 경제를 발전시키면 모든 것이 잘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눈을 딱 감고 경제만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큰 국세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두들 이 큰 국세에 복종해야만 합니다.[각주:10]


보통 독재자[각주:11]들은 자신의 권력을 지탱해줄 군부에 호의적이지만 덩샤오핑은 그러지 않았다는 점이 흥미로운 대목이다.




  1. (中国共产党中央文献编辑委员会 編, 『邓小平文选』, 第三卷, 北京: 人民出版社, 1993.) 김승일 역, 『등소평 문선』,하권, 서울: 범우사, 1994, pp.225-226. [본문으로]
  2. 오진용, 『김일성시대의 중소와 남북한』, 파주: 나남, 2004, 제2장. [본문으로]
  3. (中国共产党中央文献编辑委员会 編, 『邓小平文选』, 第三卷, 北京: 人民出版社, 1993.) 김승일 역, 『등소평 문선』,하권, 서울: 범우사, 1994, p.20. [본문으로]
  4. ibid., p.61. [본문으로]
  5. ibid., p.249. [본문으로]
  6. (上村幸治, 『中国権力核心』, 東京: 文藝春秋, 2000.) 송현웅 역, 『중국 권력핵심』, 서울: 청어람미디어, 2002, p.154. [본문으로]
  7. (中国共产党中央文献编辑委员会 編, 『邓小平文选』, 第三卷, 北京: 人民出版社, 1993.) 김승일 역, 『등소평 문선』,상권, 서울: 범우사, 1994, pp.26-27. [본문으로]
  8. ibid., pp.26-27. [본문으로]
  9. ibid., 하권, pp.158-159. [본문으로]
  10. ibid., 하권, pp.185-186. [본문으로]
  11. 물론, 덩샤오핑이 마오쩌둥이나 김일성, 스탈린 같이 혼자서 막강한 권력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본문으로]

'중앙독서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오쩌둥 평전①  (0) 2018.02.16
조선통치 비화  (0) 2018.02.09
모택동의 사생활  (2) 2018.01.26
교육위원회, 무엇이 문제인가  (8) 2018.01.19
중국공산당은 어떻게 통치하는가  (6) 2018.01.12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알림
본 블로그는 해상도 1536×864와 엣지에서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Since 2008.09.15.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