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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독서국

모택동의 사생활

소노라 2018.01.26 21:29

(Li Zhisui, The Private Life of Chairman Mao: The Memoirs of Mao's Personal Physician, London: Chatto & Windus, 1994.) 손풍삼 역, 『毛澤東의 私生活』, 서울: 고려원, 1995.


이 책의 저자 리즈수이(이지수)는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그 자신도 의사가 되었으며, 특히 오랜 시간 마오쩌둥(모택동)의 주치의를 지낸 인물이다. 아무리 높은 권력자라고 해도 죽음과 질병은 피할 수 없다. 따라서 권력자들은 자기 주치의 앞에서는 하나의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간다. 그 점은 마오쩌둥도 마찬가지였다. 저자가 이 책에서 폭로한 마오쩌둥의 (성적으로나, 위생적으로나) 지저분하고 번잡한 사생활은 이제 거의 정설로 인정받고 있다. 비록 중국공산당은 리즈수이의 조작이라고 폄훼했지만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리즈수이의 당대 유력 정치인들에 대한 평가가 재미있다.


화궈펑에 대해서는 "그의 성실함과 정중함은 부패하고 타락한 당 관료들 중에서 찾아보기 힘"[각주:1]들다고 말했다. 특히 대약진 운동 당시 대부분의 지방 간부들은 상부에 식량 생산량이 증가하고 있다고 거짓 보고를 했지만, 화궈펑만큼은 용감하게 사실을 말했다는 것이다. 리즈수이는 펑더화이에 대해서도 "정치국에서 가장 솔직하고 정직한 사람이었으며 마오에게 끊임없이 맞서는 유일한 최고위 지도자"[각주:2]였노라고 적고 있다. 반면, 문화대혁명 시절 사인방의 한 축이었던 왕훙원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왕훙원은 늘씬한 키에 아주 잘생긴 얼굴로 유식해 보였다. 그러나 외모와는 달리, 그는 영리한 편이 못되었다. 간신히 중학교를 졸업했으며, 정치적으로 공헌한 바도 없는 사람이었다.[각주:3]


한편, 마오쩌둥이 자신이 죽은 후 다른 나라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보기 위해 약간의 '속임수'를 쓰곤 했다. 다른 나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곧 죽을 병에 걸렸으며 시한부 인생인 듯 연기를 한 것이다.


그는 먼저 나와 다른 측근들이 보는 앞에서 여러 번 연기 연습을 했다. 그는 타월로 된 담요를 덮고 혼수 상태에 빠지기 직전에 언어 장애가 일어난 체했다. 「환자처럼 보이나?」



그는 우리에게 연기를 선보인 후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나서 소련 대사를 침실로 불러들인 다음 극적으로 연기했다.



마오는 1965년에도 언론인이자 자신의 오랜 친구인 에드거 스노에게 곧 하느님을 만나러 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또한 그는 같은 해에 유럽 언론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프랑스 문화부 장관 앙드레 말로 앞에서도 똑같은 연기를 했다.[각주:4]



마오쩌둥은 자신의 만년을 침대에서 보냈다. 일상생활도 어려운 수준이었다. 마오는 파킨슨병을 앓았다고 알려져 있다. 마오를 위해 한 젊은 여성이 기밀비서로 임명되었는데, 리즈수이가 회고하는 그녀의 위세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녀가 아니고서는 고위 당원들조차 마오를 만나지 못할 정도였다. 1976년 6월, 그러니까 마오가 죽기 불과 3개월전에 화궈펑이 마오를 만나기 위해 왔는데 그녀가 졸고 있느라 화궈펑은 마오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갈 정도였다. 당시 화궈펑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부주석이자 국무원 총리를 맡고 있는 최고위급 인사였다.


또, 마오쩌둥이 국가주석직을 사임하게 된 계기도 흥미롭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 수립 이후 마오쩌둥은 중앙인민정부 주석을 맡아 왔으며, 1954년 헌법이 제정되자 국가주석의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1956년 무렵부터 마오는 차기 국가주석에 취임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결국, 1958년 11~12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제8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는 「마오쩌둥 주석이 제기한 그 자신이 차기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후보가 되지 않겠다는 건의를 동의하는 데 관한 결의」를 통과시켰다. 이듬해 4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후임 국가주석에 당 부주석이었던 류샤오치가 당선된다.


마오쩌둥이 국가주석직에서 내려온 것은 대약진 운동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진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그런데 리즈수이는 마오가 국가주석직을 물려준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고 말한다. 바로 마오가 국경절과 노동절 행사를 버거워했다는 것이다.


일년 중 국경절과 노동절 이틀이 마오가 일찍 일어나 시간에 맞춰 움직이는 유일한 날이었을 것이다. 마오는 기념식 전날에는 몹시 흥분했고 불면증도 심해졌다. 어떤 때는 행사 전날 밤을 꼬박 세운 적도 있었다. 군중들의 추종에 마음이 달뜬 마오는 행사를 끝까지 참관하다가 나중에 감기에 걸리는 일이 잦았다. 가끔 감기가 기관지염으로 악화되어 여러 주 동안 고생하기도 했고, 나이가 들면서 기관지염은 폐렴으로까지 발전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마오는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정장을 해야 하는 것을 대단히 싫어했다. 나중에 그가 공화국의 주석 자리에서 물러난 이유 중 하나도 그 두 가지 기념 행사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각주:5]


그런데 사실 마오쩌둥이 대약진 운동 구상을 들고 나온 것은 1958년경이다. 1958년 2월 2일자 인민일보 사설을 보자.


우리나라는 지금 전국적으로 대약진하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공업건설과 공업생산이 대약진할 것이고 농업생산이 대약진할 것이며 문교·위생사업도 대약진할 것이다.[각주:6]


이처럼 대약진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58년 경 이다. 마오가 국가주석직을 연임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은 1956년 무렵부터이니 대약진 운동 실패의 책임을 지고 마오가 국가주석직에서 사임했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볼 때 맞지 않는 말인 것이다. 고쿠분 료세이(国分良成)도 이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마오쩌둥이 차기 국가주석 취임을 사퇴하는 것이 정식으로 결의되었다. 이에 대해 기존에는 대약진운동 실패의 책임을 스스로 진 것이라는 등의 논의가 있었는데, 결론을 말하자면 양자는 무관했다. 이 시점까지는 아직 대약진 운동의 대실패가 명확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마오쩌둥의 국가주석 사임 문제는 대약진운동 이전부터 지도부의 '일선'과 '이선'의 구분 등과 관련해 자주 그 자신의 입을 통해 거론되었기 때문이다.[각주:7]


한편, 사회주의 국가들은 정치가 폐쇄적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좀처럼 그 속을 들여다보기 힘들다. 그래서 주요 행사때 정치인들의 좌석 배치를 두고 권력 서열을 추론하고, 또 '있어야 하는 데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숙청이 있었음을 예상하기도 한다. 물론 사회주의 정치인들도 이를 잘 알고 있다. 1956년 노동절날, 주더는 병에 걸린 아픈 몸을 이끌고 마오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어야 했다는 것이다.


1956년 노동절 날, 흐루시초프의 연설과 주더에 대한 마오의 비난이 있은 지 두 달 후에 주더는 병에 걸렸다. 천안문 행사에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심각했다. 하지만 중국의 고위 지도자들이 노동절 기념식에서 찍는 사진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이력이 되었기 때문에 주더는 세계 언론에서 그의 불참을 이상하게 보도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그는 나의 친구이자 런비스의 미망인 천충잉에게 <내가 빠지면 사람들이 무슨 정치적 실수라도 범해서 노동절 행사에 참석을 허가받지 못한 것으로 생각할거야>라고 말했다. 그래서 주더는 사진을 찍을 때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나 마오와 가까이 서서 사진을 찍었다.[각주:8]


여러모로 재미있고 흥미로운 책이다. 신빙성을 의심 할 수 있겠지만, 저자의 진술은 대체로 믿을만 한 것으로 판명난 것으로 알고 있다.




  1. (Li Zhisui, The Private Life of Chairman Mao: The Memoirs of Mao's Personal Physician, London: Chatto & Windus, 1994.). 손풍삼 역, 『毛澤東의 私生活』, 제1권, 서울: 고려원, 1995, p.25. [본문으로]
  2. ibid., 1권, p.164. [본문으로]
  3. ibid., 1권, p.35. [본문으로]
  4. ibid., 1권, pp.180-181. [본문으로]
  5. (Li Zhisui, The Private Life of Chairman Mao: The Memoirs of Mao's Personal Physician, London: Chatto & Windus, 1994.).; 손풍삼 역, 『毛澤東의 私生活』, 1권, 서울: 고려원, 1995, pp.160-161. [본문으로]
  6. (中国共产党中央委员会文獻研究室, 『關于建國以來黨的若干歷史問題的決議』, 北京: 人民出版社, 1985.); 허원 역, 『정통 중국 현대사: 중국공산당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 서울: 사계절, 1990, p.294.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7. (国分良成, 『現代中国の政治と官僚制』, 東京: 慶應義塾大学出版会, 2004..); 이용빈 역, 『현대 중국의 정치와 관료제』, 파주: 한울, 2016, p. 137. [본문으로]
  8. (Li Zhisui, The Private Life of Chairman Mao: The Memoirs of Mao's Personal Physician, London: Chatto & Windus, 1994.). 손풍삼 역, 『毛澤東의 私生活』, 제1권, 서울: 고려원, 1995, pp.200-20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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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s://daesae.tistory.com BlogIcon Daeinysm 개인진술이나 회고록 같은거 읽고 공부하는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개인의 시선이 들어가니까 신뢰성있는 자료라기보다는 사람간의 친밀도 같은것도 알 수 있을거구요. 2018.01.27 17:10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sonora.tistory.com BlogIcon 소노라 말씀하신대로 자서전/회고록은 자신의 지난날을 미화하거나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조금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중국 같은 통제국가에서 나오는 고위급 인사들의 자서전이나 회고록은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왜곡되는 경우도 허다하지요. 이 책도 회고록이긴 한데, 관찰자로서 성격이 강한 회고록이죠. 근래에는 신빙성도 높이 평가 받아서 여러군데에서 인용이 되기도 합니다. 2018.01.28 09:1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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