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노라 송신소

전범은 우리가 직접 처벌한다

일본 2016.08.14 18:47 by 소노라

1945년 9월 11일, 도조 히데키 등 A급 전범(평화에 반하는 죄) 혐의자 39명에 대한 체포 명령이 떨어졌다. 이튿날, 히가시쿠니 내각은 일본이 자체적으로 전범 재판을 실시한다는 각의를 내렸다. 히로히토는 이 결정에 대해 재고를 촉구했는데, 다음날 열린 각의에서도 같은 결정이 내려지자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9월 13일, 당시 외무 대신이자 훗날 총리가 되는 시게미츠 마모루가 이러한 의사를 연합군 측에 전달했지만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스스로 전범 재판을 진행했다.


일본은 1945년 9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B/C급(인도에 반하는 죄와 통상적 전쟁범죄 행위) 전범 8명에 대한 재판을 진행했다. 일본이 스스로 전범을 처벌하기를 원했던 것은, 일본에서 재판을 하고 나면 일사부재리원칙에 따라 연합군 측에서 처벌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이 재판은 연합군의 포고령에 의해 무효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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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강하

일본 2016.08.13 17:09 by 소노라

내각책임제에서 내각의 각료는 국회 의원인 것이 보통이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일본의 경우 국무대신의 과반을 국회의원 중에서 임명해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반대로 일단 각료의 과반을 국회 의원 중에서 선임하고 나면, 나머지 국무대신들이 반드시 국회의원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각총리대신(총리, 수상)의 경우는 이야기가 달라서, 반드시 국회의원이어야 하는데 이는 일본국 헌법 제67조에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은 현행 평화헌법의 이야기이고, 메이지 헌법 체제에서는 총리가 반드시 국회의원일 필요가 없었다. 의원이 아니더라도 덴노(천황, 일왕)의 명령을 받아 총리가 되고, 내각을 조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대명강하라고 한다.


대명강하에 따라 마지막으로 총리가 된 것은 제1차 요시다 내각의 요시다 시게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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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대신 현역무관제

일본 2016.08.12 18:20 by 소노라

군부대신 현역무관제는 육군 대신과 해군 대신은 반드시 현역 대장이나 중장 가운데 임명해야 한다는 것으로 1900년 제2차 야마가타 내각때 제도화됐다.


육군은 이 제도를 악용해 내각을 붕괴시킨 적도 있었다. 1912년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이, 육군이 요구한 사단 증설안을 거부하자 우에하라 유사쿠 육군 대신이 사직해버렸던 것이다. 우에하라는 사직하면서 후임자를 추천하지 않았고, 육군 측에서도 후임자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사이온지 내각은 붕괴했다.


이듬해인 1913년 제1차 야마모토 내각은 이 제도를 개정한다. 군부대신이 반드시 현역일 필요는 없고, 예비역이나 후비역 대장 또는 중장이 임명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는 당시 총리였던 야마모토 곤노효에가 사쓰마 군벌의 실력자로 해군 대장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936년 5월, 히로타 내각은 군부대신 현역무관제를 부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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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타야마 내각

일본 2016.08.10 19:01 by 소노라

카타야마 데츠는 처음으로 사회당 당수로 일본 총리가 된 인물이며,

처음으로 기독교도로 일본 총리가 된 인물이다.



1947년 4월 25일 치뤄진 제23회 중의원 총선거에서 카타야마 테츠(가타야마 데쓰)가 이끄는 사회당이 제1당이 됐다. 당시 사회당의 의석은 143석으로 총의석 466석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제2당은 요시다 시게루가 이끄는 자유당이었는데, 사회당과의 의석수 차이는 불과 12석이었고, 득표율은 오히려 자유당이 사회당보다 높았다. 제3당은 124석의 민주당이었고, 그 뒤를 31석의 국민협동당(국협당) 등이 따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즈음 사회당의 좌파와 우파는 연정 노선을 두고 갈등을 일으키는데, 그 핵심은 자유당을 연립 정권에 포함시킬 것인가의 여부였다. 어느 한 당도 과반 의석을 획득하지 못해 단독 정권 수립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민주당도 민주당과 자유당을 중심으로 한 연정을 구성하자는 쪽과 민주당과 사회당 중심의 연정을 구성하자는 쪽으로 분열된다.


5월 8일, 카타야마 테츠(사회당)와 요시다 시게루(자유당)간의 회동이 있었고, 이튿날에는 사회당·자유당·민주당·국민협동당간의 4당 회담이 있었다. 이들은 4당 연립정권을 구성한다는 큰 틀에 합의한다. 5월 12일에 열린 간사장 회담에서는 각료 배분을 사회당 5 자유당 5: 민주당 5: 국민협동당 1로 하기로 했다.


그러나 요시다 시게루는 사회당과의 연정을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사회당(좌파)과 공산당의 관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으며, 이는 단순히 사회당 좌파의 입각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당 당 차원에서 좌파를 일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당연히 다른 당에 내정 간섭을 하는 것이였고, 요시다 시게루의 자유당은 이를 구실 삼아 연정 교섭에서 벗어난다.



사회당하고 연정하기는 싫고, 무슨 핑계를 대지?

1년 4개월 후, 요시다 시게루는 총리에 복귀하고, 이어 6년 이상을 총리로 집권하게 된다.


이렇게 연정 구상에서 자유당이 이탈함에 따라, 사회당·민주당·국민협동당의 3당 연립 내각이 구성되게 된다. 각료 배분은 사회당 7: 민주당 7: 국민협동당 2로 이루어졌으며, 그밖에 참의원 녹풍회 소속 와다 히로오가 경제안정본부 총무장관과 물가청 장관에 임명된다. 참고로, 일본 정부조직에서 각 성의 수장은 대신이라 하며, 각 청의 수장을 장관이라 한다.


카타야마 내각의 성립은 1947년 5월 24일이지만, 실질적인 성립일은 6월 1일이다. 그 사이 외무대신, 내무대신, 대장대신, 사법대신, 문부대신, 후생대신, 농림대신, 상공대신, 운수대신, 체신대신과 물가청 장관 등의 직무는 카타야마 총리가 대리했다.


카타야마는 기독교도였는데, 당시 연합군 사령관이던 맥아더는 한국과 필리핀에 이어 일본 정치가 기독교에 의해 인도되도록 한 것을 자신의 업적이라고 자화자찬했다고 한다.


전시 일본의 식량 부족 현상은 심각했고, 전후에도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전후에도 식량 부족과 인플레이션은 계속됐다. 1946년 6월 2.7엔이던 쌀 1되의 공정 가격은 4년여가 지난 1950년 3월에는 62.3엔까지 올랐다. 암시장의 시세는 공정 가격보다 훨씬 높았는데, 1947년에는 공정 가격의 9배 수준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카타야마 내각은 신물가체계를 결정한다. 물가수준을 전전의 60~65배 수준으로, 근로자의 임금을 전전의 27~28배로 한다는 것이 골자였는데 사실상 근로자들에게 내핍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카타야마 내각은 크고 작은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탄광의 국가 관리를 두고 갈등이 있었다. 1947년 11월 4일, 카타야마는 신헌법에서 부여된 총리의 각료 파면권[각주:1]을 발동해 히라노 리키조우(平野力三) 농림대신을 파면했다.


사회당 좌파는 후임 농림대신에 노미조 마사루(野溝勝)를 추천했지만, 사회당 우파와 민주당, 국민협동당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사회당 좌파는 '당내 야당'을 선언했다. 사회당 좌파와 우파의 협력이 붕괴된 것이다. 민주당 역시 탄광 국가 관리 문제로 시데하라파 의원들이 탈당, 동지클럽을 결성해 분열된 상황이었다.


경제정책과 관련해서도 갈등이 있었다. 경제안정본부는 신물가체계를 통한 인플레이션 억제를 주장한 반면, 민주당과 대장성은 신물가체계 유지보다는 균형재정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억제할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카타야마 내각은 1948년 2월 10일 총사직한다. 기본적으로 연립 정권인데다 제1당인 사회당이 좌파와 우파로 분열되어 있어서 9개월 단명 정권으로 끝이 난 것이다. 후임 내각에는 역시 사회·민주·국민협동 3당을 연립 여당으로 하는 아시다 내각이 출범(3월 10일)한다.


지금의 후생노동성의 전신인 노동성이 창설된 것과 내무성이 해체된 것도 카타야마 내각때의 일이었다.


내무성은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지방자치·지방분권 개혁에 저항했는데,

특히 지사 공선제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1. 제68조 2항에서는 "내각총리대신은 임의로 국무대신을 파면할 수 있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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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하이루이)

중국 2016.08.10 18:53 by 소노라

해서(하이루이). 명나라 사람으로 고향은 해남도(하이난도). 자는 여현, 호는 강봉, 시호는 충개.


명나라의 과거 제도는 3단계였는데, 그 중 첫 단계인 향시에 합격하면 거인이라 불렸다. 거인은 회시와 전시에 응시할 수 있었고, 합격하면 진사가 됐다. 해서는 거인으로 관직을 시작했다.


1558년, 해서는 절강성(저장성) 순안현의 지현으로 부임했다. 당시 총독이던 호종헌의 아들은 자기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행패를 부렸고, 관원들을 모욕했다. 그러자 해서는 그가 가지고 있던 은자를 몰수하고, 총독부로 그를 호송시켰다. 그리고는 총독인 호종헌에게는 "각하께서 이런 자식을 둘 리가 없으니 이 사람이 각하의 아들이라는 것은 거짓이며, 이 사람은 가짜임에 틀림없습니다"라고 보고했다.


1560년, 좌부도어사 언무경이 지방 각 지를 순찰중에 있었다. 그는 사치스럽게 대접하지 말라고 발표했으나 이는 진심이 아니었다. 강직한 해서는 언무경에게 "각하께서 절강성까지 오시는 동안 가는 곳마다 술자리가 벌어졌고, 그때마다 은 3,4백냥을 소비했다고 들었습니다"라면서 허영과 착취를 그만둘 것을 요구했다.


1562년 해서는 강서성 흥국 지현으로 이동했는데, 그 해에 수석 내각대학사(수보) 엄숭이 실각했다. 이때, 호종헌과 언무경도 엄숭의 측근이었기 때문에 실각했다. 해서가 호종헌과 언무경이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 저항한 용기 있는 행동이 높은 평가를 받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다.


1565년 해서는 호부주사가 되었다. 그 해 11월, 해서는 가정제에게 치안소라는 상주문을 올린다. 치안소는 가정제의 잘못된 행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었고, 특히 가정제의 연호인 가정을 "사람들은 집집마다 남겨진 재산이 없이 깨끗하게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라면서, "세상 사람들이 폐하를 별 가치 없는 분으로 여긴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는 내외의 신하들이 모두 알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가정제는 몹시 분노하여 해서를 당장 체포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때 옆에 있던 황금이라는 환관이 "해서는 원래부터 기이한 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상주문을 올릴 때에는 죽음을 각오해 (자신의) 관을 사고,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했으며, 노비들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는 도망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명사 해서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1566년 2월 말, 가정제는 마침내 해서를 투옥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형부에서는 해서를 사형에 처하라고 했는데, 내각대학사 서계가 이를 막았다. 그렇게 10여개월이 지난 어느 날, 해서에게 술과 안주가 대접된다. 사형 집행 전 마지막 식사라고 생각한 해서는 이를 맛있게 먹었지만, 황제가 죽었다(붕어)는 소식을 듣게 되자, 몹시 슬퍼하며 먹은 음식을 모두 토해냈다. 가정제의 뒤를 이어 융경제가 즉위하자 해서는 석방되었다.


해서는 승진하여 정4품에 올랐다. 그러나 그에게는 권한과 책임 없는 자리가 주어졌다. 해서는 자신을 사직시켜 달라는 상주문을 올렸는데 진정한 의미는 자신을 권한과 책임이 따르는 자리로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그 요청은 받아들여졌고 해서는 남직예순무가 되었다.


해서의 남직예 부임이 발표되자 많은 지방관들이 보직 변경이나 퇴직을 신청했다고 한다. 남직예순무 해서는 부당한 방법으로 땅을 빼앗아 빈농의 원망을 많이 사던 한 가문에게 땅을 돌려주라고 했으며, 서척이라는 사람을 체포했다. 서척은 서계의 동생이다. 즉, 원망을 많이 샀던 그 가문은 바로 서계 일가였던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서계는 개인적으로 해서에게는 생명의 은인이었다.


해서가 남직예순무로 부임한 지 8개월여가 되었을 때 이부에서는 해서를 탄핵하는 상주문을 근거로 해서를 순무에서 해임하고 권한이 없는 한직으로 부임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분노한 해서는 1570년 봄에 사직했다.


해서가 다시 부름을 받은 건 15년이 지난 1585년의 일이었다. 그 해 2월, 해서는 남경도찰원 우첨도어사가 되었는데, 해남도에서 남경까지 부임하는 데 자비를 써서 부임했다. 1587년, 해서는 사망했는데, 임종 직전 자신에게 온 녹봉이 더 많이 지급되었다고 하여 돌려보냈다고 한다. 


해서는 청백리의 상징으로 포청천에 빗대어져 해청천이라고도 불린다. 정약용 역시 목민심서에서 해서를 청백리의 대표적인 인물의 하나로 소개하고 있다.


[참고 자료]

1. Ray Huang, 김한식 외 역, 『1587 만력 15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 서울: 새물결, 2004.

2. 이태준, "조선의 박수량(朴守良)과 명나라 해서(海瑞)의 반부패 행적 및 청렴성 비교 연구," 『아시아문화연구』 36, 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2014, pp.149-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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