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노라 송신소

해서(하이루이)

중국 2016.08.10 18:53 by 소노라

해서(하이루이). 명나라 사람으로 고향은 해남도(하이난도). 자는 여현, 호는 강봉, 시호는 충개.


명나라의 과거 제도는 3단계였는데, 그 중 첫 단계인 향시에 합격하면 거인이라 불렸다. 거인은 회시와 전시에 응시할 수 있었고, 합격하면 진사가 됐다. 해서는 거인으로 관직을 시작했다.


1558년, 해서는 절강성(저장성) 순안현의 지현으로 부임했다. 당시 총독이던 호종헌의 아들은 자기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행패를 부렸고, 관원들을 모욕했다. 그러자 해서는 그가 가지고 있던 은자를 몰수하고, 총독부로 그를 호송시켰다. 그리고는 총독인 호종헌에게는 "각하께서 이런 자식을 둘 리가 없으니 이 사람이 각하의 아들이라는 것은 거짓이며, 이 사람은 가짜임에 틀림없습니다"라고 보고했다.


1560년, 좌부도어사 언무경이 지방 각 지를 순찰중에 있었다. 그는 사치스럽게 대접하지 말라고 발표했으나 이는 진심이 아니었다. 강직한 해서는 언무경에게 "각하께서 절강성까지 오시는 동안 가는 곳마다 술자리가 벌어졌고, 그때마다 은 3,4백냥을 소비했다고 들었습니다"라면서 허영과 착취를 그만둘 것을 요구했다.


1562년 해서는 강서성 흥국 지현으로 이동했는데, 그 해에 수석 내각대학사(수보) 엄숭이 실각했다. 이때, 호종헌과 언무경도 엄숭의 측근이었기 때문에 실각했다. 해서가 호종헌과 언무경이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 저항한 용기 있는 행동이 높은 평가를 받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다.


1565년 해서는 호부주사가 되었다. 그 해 11월, 해서는 가정제에게 치안소라는 상주문을 올린다. 치안소는 가정제의 잘못된 행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었고, 특히 가정제의 연호인 가정을 "사람들은 집집마다 남겨진 재산이 없이 깨끗하게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라면서, "세상 사람들이 폐하를 별 가치 없는 분으로 여긴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는 내외의 신하들이 모두 알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가정제는 몹시 분노하여 해서를 당장 체포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때 옆에 있던 황금이라는 환관이 "해서는 원래부터 기이한 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상주문을 올릴 때에는 죽음을 각오해 (자신의) 관을 사고,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했으며, 노비들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는 도망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명사 해서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1566년 2월 말, 가정제는 마침내 해서를 투옥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형부에서는 해서를 사형에 처하라고 했는데, 내각대학사 서계가 이를 막았다. 그렇게 10여개월이 지난 어느 날, 해서에게 술과 안주가 대접된다. 사형 집행 전 마지막 식사라고 생각한 해서는 이를 맛있게 먹었지만, 황제가 죽었다(붕어)는 소식을 듣게 되자, 몹시 슬퍼하며 먹은 음식을 모두 토해냈다. 가정제의 뒤를 이어 융경제가 즉위하자 해서는 석방되었다.


해서는 승진하여 정4품에 올랐다. 그러나 그에게는 권한과 책임 없는 자리가 주어졌다. 해서는 자신을 사직시켜 달라는 상주문을 올렸는데 진정한 의미는 자신을 권한과 책임이 따르는 자리로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그 요청은 받아들여졌고 해서는 남직예순무가 되었다.


해서의 남직예 부임이 발표되자 많은 지방관들이 보직 변경이나 퇴직을 신청했다고 한다. 남직예순무 해서는 부당한 방법으로 땅을 빼앗아 빈농의 원망을 많이 사던 한 가문에게 땅을 돌려주라고 했으며, 서척이라는 사람을 체포했다. 서척은 서계의 동생이다. 즉, 원망을 많이 샀던 그 가문은 바로 서계 일가였던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서계는 개인적으로 해서에게는 생명의 은인이었다.


해서가 남직예순무로 부임한 지 8개월여가 되었을 때 이부에서는 해서를 탄핵하는 상주문을 근거로 해서를 순무에서 해임하고 권한이 없는 한직으로 부임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분노한 해서는 1570년 봄에 사직했다.


해서가 다시 부름을 받은 건 15년이 지난 1585년의 일이었다. 그 해 2월, 해서는 남경도찰원 우첨도어사가 되었는데, 해남도에서 남경까지 부임하는 데 자비를 써서 부임했다. 1587년, 해서는 사망했는데, 임종 직전 자신에게 온 녹봉이 더 많이 지급되었다고 하여 돌려보냈다고 한다. 


해서는 청백리의 상징으로 포청천에 빗대어져 해청천이라고도 불린다. 정약용 역시 목민심서에서 해서를 청백리의 대표적인 인물의 하나로 소개하고 있다.


[참고 자료]

1. Ray Huang, 김한식 외 역, 『1587 만력 15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 서울: 새물결, 2004.

2. 이태준, "조선의 박수량(朴守良)과 명나라 해서(海瑞)의 반부패 행적 및 청렴성 비교 연구," 『아시아문화연구』 36, 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2014, pp.149-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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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1 공정기요(571공정기요)

중국 2016.07.19 19:25 by 소노라

1970년 8월 23일, 루산에서 중국 공산당 제9기 중앙위원회 제2차 전체회의(9기 2중전회)가 열렸다. 린뱌오와 천보다는 폐지하기로 되어 있던 국가주석직을 유지해야 하며, 마오쩌둥이 국가주석에 재취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오는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1949년부터 류사오치에게 국가주석직을 물려준 1959년 4월까지 국가주석이었다. 마오의 뒤를 이어 국가주석이 된 류사오치는 말년에 문화대혁명을 겪으면서 예기치 않은 순교자가 됐고, 이후 국가주석직은 공석 상태였다.


그런데 린뱌오와 천보다의 국가주석직을 부활시키자는 주장은 마오의 방침과 충돌하는 것이었다. 마오는 그 해 초, 국가주석직을 폐지할 것을 주장한 바 있었다. 또 린과 천은, 마오를 천재로 찬양하는 문구를 헌법에 추가하자고 제안했다. 여기에 더해, 천은 마오가 국가주석이 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마오가 천재임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8월 31일, 마오가 반격을 개시했다. 천보다는 오랫 동안 마오쩌둥의 비서를 지냈고, 1969년 제9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이 됐다. 당내 서열도 마오쩌둥, 린뱌오, 저우언라이에 이은 4위였다. 천보다는 그의 정치 경력 마지막에 린뱌오와 손을 잡게 되지만, 그 결정은 최악의 한 수임이 드러났다. 이 회의에서 천보다는 "중국의 트로츠키"가 되어 당에서 제명됐다.


그러나 아직 린뱌오를 바로 제거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1971년 8월과 9월 사이 마오쩌둥은 지방을 시찰하며 연설을 하러 다녔다. 이때 마오는 지방의 인민해방군들이 자신을 지지하는지를 점검했다고 한다. 한 달에 걸친 시찰에서 마오는 중국 공산당 역사에서 총 아홉 번에 걸친 노선 (분파) 투쟁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난해 열린 2중전회에서도 동일한 분파 투쟁이 있었다고 말했다. 불길한 징조였다.


당 부주석이자 국무원 부총리 겸 국방부장인 린뱌오의 아들 린리궈는 공군에서 작전부 부부장과 판공실 부주임을 맡고 있었다. 당시 공군사령원이었던 우파셴의 증언에 따르면 공군과 관련된 모든 사항을 린리궈에게 보고고해야 했고, 또 그의 명령을 받아야 했다고 한다. 린리궈는 연합함대를 꾸렸는데 연합함대의 구성원은 관광례(关光烈)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공군 간부였다.


이들은 마오쩌둥을 암살한다는 내용의 571 공정기요를 입안했다. 571은 중국어로 우치이라고 발음하는데 무장기의, 무장봉기와 발음이 같다. 이 계획에서 마오는 B-52로 불렸다.


이 계획은 1. 마오가 탄 열차를 화염방사기나 대공포로 공격한다, 2. 열차가 다리를 지날 때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킨다, 3. 공중에서 열차를 폭격한다, 4. 최후의 수단으로 경호원 중 한 명이 마오를 권총으로 사살한다는 등의 계획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계획들은 실행되지 못했다. 린뱌오와 예췬(린뱌오의 부인), 린리궈 등 9명은 비행기를 타고 소련으로 향했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에게 비행기를 그냥 보낼 것인지를 물어보았다고 한다. 이때 마오의 대답은 이러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여자가 결혼하는 것 같은 일은 당연한 일이다. 가게 내버려 두어라."



그러나 린뱌오 일행이 탄 비행기는 몽골 상공에서 추락했고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마오의 후계자"로 공식 지명되었던 린뱌오의 최후였다.


중국의 "후계자"들의 낙마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마오가 죽기 전 "자네가 맡아준다면 나는 안심"이라며 후계자로 직접 점지했다던 화궈펑은 자신의 직위(중앙위원회 주석 겸 국무원 총리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를 5년도 지키지 못했다. 덩샤오핑의 첫 번째 후계자인 후야오방은 민주적 성향을 지녀 원로들의 불만을 사던 중 학생 시위의 책임을 지고 당 총서기에서 물러나야 했다. 후야오방의 죽음으로 촉발된 천안문 사태에서 온건론을 펴 원로들의 불만을 산 자오쯔양도 결국 당 총서기에서 물러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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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2016.07.18 17:32 by 소노라

1982년 11월, 20년 가까이 소련을 통치하던 브레즈네프가 사망했다. 그 뒤를 이은건 유리 안드로포프였다. 안드로포프는 1984년 2월 사망했다. 1년 3개월 남짓의 짤막한 재임 기간이었다. 안드로포프가 죽자 바통을 이어받은 건 콘스탄틴 체르넨코였다. 그는 취임 이듬해인 1985년 3월 사망했다. 역시 1년 1개월 남짓의 짤막한 재임 기간이었다. 체르넨코의 후임은 그 유명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다.


이처럼 브레즈네프의 사망부터 미하일 고르바초프 집권까지 소련은 거의 매년 최고 지도자의 장례를 치뤄야 했다. 그야말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다스렸던 것이다.


이 고르바초프의 회고록 『선택』에는 한 가지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소련 정치인 중에 안드레이 키릴렌코 라는 사람이 있었다. 농구선수와는 동명이인. 그런데 치매가 너무 심해져서 글자(사람 이름)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고,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낄낄댔다고 한다. 결국, 이듬해 그는 당 중앙 정치국 위원 자격을 상실했다.


또, 말년의 브레즈네프는 회의에서 꾸벅꾸벅 졸기일 수 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심지어 브레즈네프는 1970년대 중반부터 사임 의사를 밝혀왔지만 다른 동료들이 그를 저지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브레즈네프가 사임하면 자신들도 물러나야 할 까봐 걱정해서였다고 한다.


반면에, 중국은 주요 보직에 대한 임기 제한과 연령 제한이 있어 세대 교체가 제도화되어 있는 나라다. 원래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덩샤오핑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덩이 자신의 동료들을 이끌고 한번에 정치 일선에서 은퇴한 건 아니고 중앙고문위원회 같은 조직을 만들고 또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은 계속 가지고 있으면서 원로방으로 후임 지도부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완전히 물러났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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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 국제정치의 비극은 지난 2001년 출간된 존 미어샤이머의 The Tragedy of Great Power Politics의 한국어 번역판이다. 번역판 출간연도는 2004년.


국제정치학은 크게 자유주의(이상주의) 진영과 현실주의 진영으로 양분할 수 있다. 국가간의 교류가 활발해질수록 세계는 평화로워질 것이라는 주장이나, 민주주의는 평화를 가져온다는 민주평화론 등은 대표적인 자유주의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세계를 평화롭게 만드는 것은 현실적이진 않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들이 바로 현실주의자들이다. 물론 궂은 날씨가 하루 종일 비 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것 처럼, 평화롭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 항상 전쟁 상태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주의는 다시 한스 모겐소의 고전 현실주의와 케네스 월츠(왈츠)의 신현실주의로 나뉜다. 고전 현실주의는 국제분쟁의 원인으로 인간의 본성을 든다. 반면, 신현실주의는 무정부상태라는 국제정치의 구조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따라서 구조 현실주의라고도 한다. 


미어샤이머는 이 구조 현실주의에 속하는 학자다. 물론, 미어샤이머와 월츠의 이론에는 중대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월츠의 이론에서 국가들은(대개 강대국) 일정한 정도의 힘에 도달하면 더 이상의 힘의 추구를 주저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하지만, 미어샤이머는 힘이 안보를 보장하는 최선의 방법인 세상에서, 안보를 보장받는 최선의 방법은 패권국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국가(특히, 강대국)들은 패권국이 될 때까지 힘을 갈망하게 된다.


미어샤이머는 이러한 자신의 이론과 월츠의 이론을 구별하기 위해 전자를 공격적 현실주의(공세적 현실주의), 후자를 방어적 현실주의(수세적 현실주의)로 구분 짓는다.


미어샤이머는 안보를 보장받는 최선의 방법은 "지금 바로 패권국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전 지구적 패권국이 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미어샤이머는,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세계적 차원의 패권국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상호확증파괴(MAD)라는 말이 있다. 냉전기 공포의 핵균형을 잘 나타내주는 단어다. 미쳤다는 뜻의 mad와도 동음이의어다.(일부러 그렇게 만든 두문자약어겠지만) 미국과 소련 두 나라 중 어느 나라도 먼저 선제 공격을 통해 상대방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는 능력(제1타격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반면, 상대방으로부터 공격을 당할 경우, 당한 만큼 되돌려줄 정도의 보복력(제2타격력)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먼저 공격을 하더라도 상대를 궤멸시킬 수 없을뿐더러, 내가 준 만큼 되돌려 받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 공포의 핵균형이 돌아가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한 나라가 선제 공격을 통해 상대방을 완전히 초토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또는 상대방의 보복 공격을 완전히 무효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그 나라는 핵 우위에 서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나라는 세계적 패권국이 될 것이다. "핵 패권국"에게 "재래식 군사력의 균형이란 무의미"하다.


핵 패권을 통해 세계적 패권국이 된다는 꿈은 꿈이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상황이 아니다. 그렇다면 재래식 군사력을 통해 세계적 패권국이 될 수 있을까? 미어샤이머는 이 또한 불가능하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것은 역시 바다(특히, 대양)의 힘이다.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바다를 건너서 대규모 병력을 전개하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설령,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은 더 유리한 위치에서 전쟁에 임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미어샤이머는 강대국들의 목표는 지역 패권국이 되는 것이 목표[각주:1]라고 말한다. 패권국은 다른 대륙에 대해 역외균형자(offshore balancer)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그 이유는 다른 패권국이 자기 대륙 앞마당에서 세력균형 상태에 영향을 주어서, 자신의 패권적 지위를 망쳐놓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강대국들이 서로를 견제하는 방법에는 유화, 편승, 책임전가, 세력균형 등의 방법이 있다. 일반적으로 강대국이 강대국을 견제할 때는 세력균형의 방법이 자주 사용된다고 한다. 그러나 미어샤이머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오히려 역사를 볼 때, 자주 사용된 것은 다른 나라에 책임을 떠넘기는 전략(책임전가 전략)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전략은 국제정치의 구조(강대국의 숫자)와 관련이 있다. 단극체제 즉, 단일 강대국이 존재하는 체제는 세계적 패권국이 존재하는 체제인데 이것은 실현 불가능하다. 강대국이 두 나라가 존재하는 것은 양극체제로, 냉전이 대표적이다.


강대국이 세 나라 이상 존재하면 다극체제로 분류된다. 미어샤이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잠재적 패권국이 포함된 불균형적 다극체제와, 잠재적 패권국이 없는 균형적 다극체제로 구분한다. 이론적으로 양극체제 역시 균형적 양극체제와 불균형적 양극체제로 구별할 수 있겠지만, 불균형적 양극체제라면 곧 단극체제가 될 것이므로 무의미한 구분이 될 것이다.


체제 내에 책임을 떠넘길 다른 강대국이 존재하는 다극체제라면 책임전가의 유혹에 빠지기 쉽지만, 책임을 전가할 제3의 강대국이 없는 양극체제에서는 직접 상대와 세력균형을 맞출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다. 원본이 나온게 2001년이다. 이 책도 지난 2014년 개정판(Updated Edition)이 출판(번역 안됨)됐다. 전반적인 내용의 변화는 없지만, 중국의 부상에 대해 다룬 마지막 장에서 최근 15년간 있었던 여러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다루어지고 있다.

  1. 미어샤이머는 미국 역시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지역 패권국이라고 본다. 그리고 현대에서 지역 패권국이라는 지위를 차지한 것은 미국이 유일하다고 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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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7월 26일, 주요 3대 연합국(미국·영국·중국)의 명의로 포츠담 선언이 발표된다.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과 소련간의 중립조약이 유효했기 때문에, 소련을 통한 강화 협상(조건부 항복) 공작이 진행되고 있었다. 따라서 29일 오후 4시, 스즈키 간타로 수상은 이를 묵살한다는 '문제 발언'을 하게 된다. 일부에서는 이것이 번역의 문제였다고 이야기하고는 한다. 그러나 "포츠담 선언에는 별 가치가 없다, 전쟁 완수에 매진하겠다"는 문맥을 볼때 이것이 오역 문제가 아님은 분명해진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다. 이것이 원폭이라는 미국 측 발표에 의심을 갖던 일본 정부가 원폭임을 확인한 것은 8일이었다. 9일 오전 6시, 사코미즈 히사츠네 내각 서기관장에게 소련의 중립조약 파기 다시 말해, 소련의 대일전 참전 소식이 전달된다. 오전 10시 30분에 열린 최고전쟁지도회의가 30분 가량 진행됐을 무렵인 11시 2분에는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투하된다.

 

최고전쟁지도회의는 1944년 8월 4일 기존의 대본영정부연락회의를 대체해 새롭게 설치된 회의체였지만 연락회의와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대본영정부연락회의는 1937년 11월 처음 열렸는데 출석자는 정부에서는 내각총리대신(수상), 육군대신(육상), 해군대신(해상), 외무대신(외상)이, 대본영 측에서는 (육군)참모총장, (해군)군령부총장 등으로 내각과 통수부간의 의견을 조정하기 위해 개최된 것이다.

 

그러나 이 최고전쟁지도회의에서도 결론이 나지 않게 되자, 오후 11시 50분 히로히토가 참석한 가운데 어전 회의가 열리게 된다. 어전회의에는 추밀원 의장인 히라누마 기이치로, 내각 서기관장 사코미즈 히사츠네, 해군 군무국장 호시나 젠시로 등이 배석했다.

 

어전회의에서도 포츠담 선언의 수락을 둘러싸고 3대3의 팽팽한 대립 구도를 보이게 된다. 결국 10일 오전 2시, 스즈키 수상은 히로히토에게 성단을 요청하는데, 여기서 히로히토는 자신이 도고 외상과 생각이 같다고 말함으로써 포츠담 선언의 수락이라는 대방향이 정해지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히로히토의 1차 성단이다. 그렇다고 히로히토는 평화주의자였으며 군부에 끌려갔을 뿐이라는 식의 인식은 곤란하다.

 

정권 핵심에서 결단을 내려 달라는 요구가 나온 것은 이미 지난 2월이었다. 3차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으며 훗날 GHQ에 의해 전범 혐의자로 지목되자 자살하게 되는 고노에 후미마로가 패전은 이미 필지라는 상주문을 올린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히로히토는 더 큰 전과를 올린 후가 아니면 어렵다며 거절의 뜻을 밝혔고 그 결과로 수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아무런 의미 없이 스러져갔던 것이다.

 

10일 오전 7시, 중립국인 스위스와 스웨덴을 통해 포츠담 선언의 4대 연합국(미국·영국·중국·소련)에게 통보된다. 그 조건은 천황의 통치 대권에 수정을 가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였다.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번스 국무장관, 스팀슨 육군장관, 포레스탈 해군장관 등과 함께 회의를 열었고 일본에 대한 회신안 초안이 완성됐다. 이 초안은 다시 포츠담 선언의 다른 세 연합국 즉, 영국·중국·소련에게 전달된다. 소련은 전후 일본 점령에 대해 미국과 소련이 각각 최고사령관을 파견한다는 조건을 들었지만 이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렇게 전달된 연합국측의 회신은 다시 일본 정부에 분열을 가져오게 된다. subject to라는 부분이 문제가 된 것인데, 외무성은 군부를 의식해 이를 '(천황과 일본 정부의 통치권은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제한하에 둔다'로 번역했지만, 군부 측은 이를 '예속된다'로 번역하고 국체 유지가 불가능해지므로 1억 총옥쇄를 주장한 것이다. 이 13일의 회의에서도 다시 3대3으로 의견이 분열될 조짐을 보이자 14일 오전 11시, 다시 어전회의가 열린다. 여기서 히로히토는 최후의 선언을 내리게 된다. 바로 두 번째 성단이다.

 

2차 성단이 내려지자 종전 조서의 작성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몇 가지 수정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은 전세는 날로 불리해졌다는 부분이 전국은 호전되지 않았다로 수정된 것이다. 이 부분은 아나미 육군대신의 강력한 반발로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의 발표는 모두 거짓말이 되는 것이니, 우리는 전쟁에 패한 것이 아니라 전국이 호전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주장한 것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14일 오후 9시에는 라디오를 통해 내일 오전 중대 방송이 있을 것임이 알려진다. 그리고 밤 11시 20분부터 황궁에서 히로히토가 직접 녹음을 마쳤다. 두 장의 음반에는 5분 분량의 히로히토의 목소리가 담겨졌다. 이 음반들은 다음날 방송때까지 도쿠가와 의전비서가 보관했는데 일부 군부 인사가 이 음반을 탈취하려는 궁성 사건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15일 오전 7시 21분에는 전날 밤의 중대 방송이 히로히토의 직접 방송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정오에 히로히토의 목소리가 전파를 타게 된다. 사실 천황의 목소리가 전파를 타게 된 것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첫번째는 '사고에 의한 것'이었던만큼, 사실상 첫번째가 되는 셈이다. 당시 일반인들이 사용하지 않는 용어와 히로히토의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바로 이것을 알아들은 사람은 드물었고 이후 아나운서의 설명을 통해 일본의 패전 소식을 알게 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재밌는 점은 메이지 헌법 체제의 붕괴가 이 때를 포함해 2차 대전 시기에 매우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원래 포츠담 선언의 수락에 대한 결정은 추밀원의 자순사항에 상당하지만,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저 추밀원 의장이 어전회의에 참석하는 것으로 갈음했을 뿐이다. 진주만 공습 당시에도, 선전 포고에 대한 자순권을 갖고 있던 추밀원은 사후 추인 기관에 지나지 않았다. 내각 역시 최고전쟁지도회의에서 이루어진 결정을 형식적으로 추인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참고문헌]

小森陽一, 송태욱 역, 『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서울: 뿌리와이파리, 2004.
Stephen Walker, 권기대 역, 『카운트다운 히로시마』, 서울: 황금가지, 2005.
吉田 裕, 최혜주 역, 『아시아태평양전쟁』, 서울: 어문학사, 2012.
石川 眞澄, 박정진 역, 『일본 전후정치사』, 서울: 후마니타스, 2006.
半藤 一利, 이정현 역, 『일본의 가장 긴 하루』, 서울: 가람기획,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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